[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27)

기사입력 2000년 04월 03일 14시 14분


노인 다섯명이 방으로 들어섰을 때는 그로부터 한시간 반쯤이 지난 밤 9시경이었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고윤희가 그들을 안내해 온 것이다.

노인들은 놀라 모두가 장승처럼 굳어졌다.

방구석에는 장용수와 사내 하나가 팔 다리를 묶이고 입에 수건으로 재갈을 물린 채 쑤셔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진은 사내 하나의 시체는 화장실에 끌어다 놓았지만 방 안의 피는 닦지 않아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대진이 노인들의 앞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옷과 신발입니다. 어서 갈아 입으세요."

모두 고윤희가 백화점에서 산 고급제품 들이었다. 밖을 감시하러 고윤희가 나갔으므로 이대진이 서둘렀다.

"저고리와 바지, 신발에 이름표가 붙여져 있습니다. 어서 찾아 입으세요."

가방의 지퍼를 연 노인들이 서로 옷과 신발을 찾아 허둥대며 입었다.

"어, 어떻게된 일이요?"

저고리부터 입으면서 김성복 노인이 장용수를 힐끗거리며 물었다.

"저놈들이 배신을 했습니다. 나한테 돈만 챙기고는 영감님들을 북한 쪽에 넘기려고 했지요."

"우리를 데려온 사람은 이선생이 방에서 기다린다고 하던데."

"그놈은 우리한테 속은 겁니다. 내가 저놈을 시켜 이곳에서 노인들을 넘길테니 영감님들만 올려 보내라고 했지요."

김성복 노인이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그놈은 이 방으로 올라 가라고만 하고는 식당 문 앞에서 돌아갔소."

방에 나갔던 고윤희가 들어서더니 이대진에게 말했다.

"먼저 노인들을 모시고 가세요. 저는 조금 뒤에 따라 갈테니까."

"먼저 가라니?"

힐끗 장용수 쪽을 바라본 이대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은 각기 셋씩 둘씩 노인을 나누어 모시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야 택시를 타기에도 좋고 눈에 덜 띈다. 고윤희가 김성복 노인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하고 조 할아버지 두분만 남으세요."

그리고는 이대진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먼저 호텔로 들어가세요."

퍼뜩 눈을 치켜떴던 이대진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노인 세명과 함께 식당에 내려왔을 때 식탁에 앉은 몇사람이 시선을 주었지만 이상한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쫓기듯이 식당을 나온 그들은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노인들을 뒷자리에 밀어넣고 앞자리에 탄 이대진이 미리 고윤희에게서 받아놓은 호텔 주소가 적힌 쪽지를 운전사에게 내밀었다.

"북경동물원 앞의 성지반점으로."

그곳에서 다시 택시를 갈아탈 계획이었다. 택시를 세번 갈아탄 이대진이 남쪽 성외의 광명로 뒤쪽 길에 있는 동양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10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이미 오후에 프론트에서 방 열쇠까지 받아놓은 터라 이대진은 노인들과 곧장 4층의 객실로 들어섰다. 노인들은 3류 호텔인데도 방안의 분위기에 압도된 듯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이제는 성공 여부가 영감님들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정색한 이대진이 말하자 침대 끝과 의자에 겨우 엉덩이 일부분만 걸치고 있던 노인들이 더 긴장했다. 이대진이 말을 이었다.

"영감님들의 여권은 한국정부에서 발행한 정식여권입니다. 당당하게 행동하세요. 절대로 한국 관광객들한테도 눈치를 채게 만들면 안됩니다."

"알겠소."

이를 악물었다가 푼 노인 하나가 이대진을 바라보았다.

"난 다 외웠소. 그리고 오늘 아침에 그 종이까지 다 씹어 먹었소."

이대진은 종이를 깨끗이 없애라고 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