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전여옥 '이역만리서 일군 벤처정신'
기사입력 2000년 03월 22일 14시 51분
얼마전에 아주 멋진 편지를 받았다. 이번에 낸 책 `간절히 @ 두려움없이'를 읽은 한 독자가 보낸 전자우편이었다. 내용을 읽어보는 사이 내 가슴에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는 44세의 남자였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가 젊은 날을 `사랑하는' 직장에 바쳤다. 직장이란 무엇인가? 사실은 일터 그 이상이다. 미국의 한 조사기관에서 사람들은 가정보다도 회사에서, 가족보다도 직장동료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사실 우리에겐 그런 속내가 있다. 그는 그렇게 직장을 사랑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해외지점진출을 위해 인도네시아로 갔다. 그리고 거의 4년여…. 땀과 눈물과 고통을 이기며 일을 했다. 그리고 그는 만족했고 더 없이 행복했다. 회사를 위해 이렇게 일한다는 자부심이 그에게 넘쳤으니까. 그런데 IMF 가 터졌다. 그의 은행은 합병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한마디로 붕떴다. 그가 4년 넘게 쌓았던 공든탑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동료들은 등을 떠밀려 나갔고 그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 눈물이 솟구쳤다. 자신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모든 일이 이뤄졌다. 그에게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횡포이자 거대한 폭력이었을 것이다.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아있지 않았다. 이제 대학에 들어간 아이를 보며 그는 결심했다. 아버지가 보여줄 제 2의 인생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일어섰고 그리고 새로운 큰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그는 인도네시아에 남았다. 그리고 전산쪽의 경험을 살려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한 메일서비스와 채팅 등 메시징서비스를 주된 사업으로 하는 벤처기업을 출발시켰다.
그를 아끼는 4명의 후배가 그를 따랐고 언제나 그를 지원하는 부인이 변함없이 힘이 되어주었다. 그는 도전했다.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스타트 업！ 벤처정신으로 인도네시아라는 이국에서 국제화를 이뤘고 마침내 현지화에 성공했다.
회사라는 조직에 거의 15년가까운 시간을 몸담았던 나는 그 존재가 주는 기쁨과 아픔을 안다. 그 이기적인 사랑과 계산적인 등두드리기, 보살핌, 그리고 냉혹함도 안다. 하지만 그 조직에 있을 때는 젊은 날 `사랑하는 존재'에게 무너지듯 취해서 눈을 감고 결혼(?)을 하게 된다. 아니 그것은 결혼 이상이고 사랑 이상일 수도 있다. 그 은행은 젊은 날의 또하나의 그의 모습이었으니까….
그 분은 내 생각에 더없이 밝을 것이 틀림없다. 자신의 성공을 싫컷 자랑하고 과시해도 나는 그분을 존경하고 친구로서 동지애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이라고 옛날의 그 은행이 다시 생긴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서울로 달려가고 싶다'고. 그처럼 순수하게 일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고통으로만 기억되는 나의, 우리의 90년대 말을 그는 그 한마디로 정리하고 위로했고 축복했다.
[방송인 satuki＠chollian.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