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강우석 레디고 '걱정되는 벤처열풍'
기사입력 2000년 03월 13일 13시 28분
`벤처 열풍'이 사회전반을 휩쓸고 있는 요즘 갖가지 새로운 풍속도가 생겨나고 있다.
샐러리맨들 사이에도 빈부격차가 벌어지면서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다. 또 벤처기업으로의 인력 대이동이 펼쳐지고 있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주테크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다. 소위 `굴뚝산업'이라고 하는 제조업 종사자들은 웬지 박탈감을 느끼면서, 유행에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마저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영화쪽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시대의 추세라고 하지만, 나로선 걱정이 앞선다.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질 높은 영화를 만드는 데 주력해야할 인재들이 온통 인터넷 사업을 한다면서 들떠 있다. 서로 합종연횡을 하면서 회사를 설립하고, 기업가치나 주식가치가 수십배, 수백배 뛰었다느니 말하면서 핑크빛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젠 충무로도 영화 이야기보다는 돈 이야기가 더 화제의 중심에 선 느낌이다.
나로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약간의 황당함을 감출 수 없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천만원, 이천만원이 없어 여기저기 손 벌리고 다니던 친구가, 술좌석에서 술값 계산하라고 할까봐 이눈치 저눈치 살피던 친구가 인터넷 홈페이지 하나 만들어놓고 몇십억, 몇백억을 벌거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영화계에서 벌써 우려할만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필자의 지나치게 우려섞인 시각일지 몰라도, 흥행성이 보이거나, 작품성 있는 영화들이 기획되는 게 별로 있어보이지 않고, 많은 이들이 남의 돈 끌어들이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 형국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선 내 주위를 보자.
D 광고대행사의 J군. J군은 예전같으면, 이미 나간 광고에 대해 광고료를 못받을까봐 하루 걸러 한번씩 전화를 해선 `내가 잘 살아 있는 지' 안부를 물었고, `어음이 부도나는 것은 아닌지'라는 노파심에 회사 재무상태를 체크하곤 했다.
그렇게 붙임성이 좋았던 J군이 요즘엔 통 연락이 없었다. 어쩌다 한번 연락이 됐는데, J군은 "광고료는 당분간 놔두시고요, 인터넷 판권이나 넘기시죠"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비디오 업계에서 기반을 다져온 W사의 L군. L군이 요즘 인터넷 사업가로서 변신을 꾀하면서 투자유치에도 성공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최근엔 만난 그는 무척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나는 J군과 L군에게 이런 충고를 하고 싶다. `세상이란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단다. 본업에 충실하거라. J군은 빨리 나한테 광고비 받아갈 생각부터 하고, L군은 나역시 비디오 산업에 손댈 지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물론 나 역시 최근 흐름을 혼자서 정면 부인할 생각은 없다. 아이디어가 돈이 되고, 사람이 돈이 되는 시대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훌륭한 아이디어는, 그 아이디어를 소유한 사람의 생각이 건전할 때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마치 도박판에 뛰어드는 기분으로 벤처열풍에 편승한다면, `한탕' 못지않게 `탕진'할 확률이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학창시절부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왔고, 영화계에 투신해 착실하게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 후배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다. 시류가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진로를 바꾸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주변사람들이 `돈'보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모습'이 다시 보고 싶어진다.
[영화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