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포트] 공짜없는 사회 (1)
기사입력 2000년 03월 05일 16시 45분
지난 주에는 정말이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바빴다. 서울에서 손님이 대거 몰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료를 조사하러 온 출판사 관계자, 일본특집을 하러 온 잡지 기자, TV기자, 친구 등. 거기에다 전화벨은 시도때도 없이 울렸다. 서울로부터 온 전화들이었다. 그 중 반은 원고청탁이었고 나머지는 순수한 ‘민원'(？)이었다.
‘민원', 일방적인 청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한국에선 친한 사람들에게 `뭣 좀 부탁한다'는 말이 별로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일본에선 달랐다. 일본인들에겐 무슨 일이든지 공짜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 친구들은 이게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곤 한다.
실제로 이번 주만에도 ‘쉬리'특집을 하러 온 TV기자가 자료를 얻으러 우리집을 다녀갔고, 한 잡지기자는 아예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면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 또 서울의 한 공중파 TV PD는 재일동포들에 대한 자료를 구해 줄 수 없느냐고 마치 맡겨놓은 듯 몇 번이나 국제전화를 해왔다. 몇 군데의 잡지기자는 한 술 더떠 일본의 유명인들을 일방적으로 정해 놓고 인터뷰 섭외 좀 해달라고 했다.
이럴 때 나는 내 취재분야와 다른 원고청탁을 빼놓곤 가능하면 바쁜 시간을 쪼개 부탁을 들어주려고 애를 쓴다. 나 스스로가 한국사정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얼마 전 잘 아는 잡지 기자로부터 일본에서 꽤 유명한 어느 재일동포를 인터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별 생각없이 그 재일동포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 안부전화를 나눌만큼 친했기에 인터뷰를 할 시간만 정하면 될 거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의 전화 태도가 이상했다. 전 같으면 당장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말할텐데 말끝을 흐리면서 일 이야기는 비서하고 하란다. 나중에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인터뷰료는 얼마를 줄 거냐고. 그제서야 나는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속이 싸하니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아하!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구나!'
그 비서는 30분에서 1시간을 인터뷰할 경우 5만엔(약 55만원), 2시간일 경우에는 10만엔의 인터뷰사례비를 달라고 말했다. 서울 잡지사에 연락을 하니 예상대로 펄쩍 뛰었다.
그리고 한 방송사와 또 다른 잡지사로부터 일본의 한 유명배우를 섭외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역시 전화를 했다. 한국에서도 개봉돼서 인기를 끈 ‘철도원'의 주인공 다카구라 겐이었다. 대답은 앞의 재일동포와 똑같았다. 다만 액수만 다를 뿐이었다. 일본배우는 톱스타답게 30분에 10만엔을 달라고 요구했다. 사진을 찍을 경우엔 별도의 모델료가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일본에는 공짜라는것이 없다. 또한 어느 분야든지 프로들은 시간이 돈이므로 상대방을 위해 시간을 낼 경우, 시간당으로 철저하게 계산해서 그 대가를 받는다.
이같은 시스템은 일본에서는 일반적인 관례로 굳어져 있다.
얼마 전 일본의 닛칸스포츠사에서 전화가 왔다. 현재 일본에서 대히트한 한국영화 ‘쉬리'와 한국에서 히트하고 있는 일본영화 ‘철도원'을 비교해 달라는 것이었다.
약 30분 정도 내 의견을 말해 줬다. 그리고 정확히 열흘이 지나 통지서가 왔다. 2만엔의 사례비가 내 통장에 입금됐다는 보고서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전화 코멘트는 대개 5천엔에서 1만엔 정도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2만엔이라니. 즉시 담당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액수가 너무 많다고. 그러자 그 기자는 오히려 미안한 듯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 적게 드려서 죄송해요. 요즘 일본도 불경기라서 많이 깎였어요.”
그 기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마음속으로 ‘아, 나루호도(역시)'를 연발했다. 그것은 내가 ‘쉬리'와 ‘철도원'에 대한 한국신문 기사 자료를 팩스로 보내 준 것에 대한 자료비가 1만엔 포함된 것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