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투쟁 (29)
기사입력 2000년 02월 28일 14시 29분
"동광무역하고 거래를 하셨단 말입니까?"
접어두고 먼저 그렇게 묻자 최씨는 다시 어깨를 폈다.
"내 소개로 중국산 콩과 깨를 열 컨테이너나 가져갔단 말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문이 배는 남았을 겁니다."
"대단하군요."
정색한 이대진이 머리를 끄덕였다. 콩과 깨를 밀수로 들여갔단 말인데 그만하면 동광무역의 실체가 짐작이 갔다.
머지않아 TV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윗도리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김사장이 나타날 것이다.
"단동에서부터 노인들을 모셔왔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그분들을 알게 되셨지요?"
불쑥 이대진이 묻자 최씨가 들었던 물잔을 내려놓았다.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단동에 우리 친구들이 있지요."
"탈북자를 돕는 친구들 말입니까?"
"그렇지요."
그때 시킨 술과 고기요리가 들어 왔으므로 그들은 말을 그쳤다. 아무렇게나 시켰지만 커다란 접시에 담긴 돼지고기는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먼저 술병을 든 이대진이 최씨의 잔에 독한 향을 품는 술을 따랐다.
"그렇게 1인당 5만 위안이라면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우리는 민간자선단체라 자금 여유가 적어서 그럽니다."
그러자 최씨가 입술을 비틀더니 말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비싼 것이 아닙니다. 지난 달에는 탈북자 한 명한테서 3만5000 위안을 받았단 말입니다."
"누구한테서 받았습니까?"
"한국에 있는 친척한테서 받았지요."
이대진이 사기 잔에 든 술을 한 모금에 삼켰다가 입을 딱 벌렸다. 식도를 따라 불덩이가 떨어지는 것 같았고 입에서는 불길이 뿜어지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60∼70도쯤 되는 술이었다. 길게 숨을 뱉고난 이대진은 다시 술을 채웠다.
이 자들은 탈북자 전문이었다. 아직 공갈단인지 사기꾼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전쟁포로가 되었다가 탈북한 노인들을 데리고 있을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백자병에 담긴 독주를 둘이서 반병 쯤 마셨을 때였다.
이대진은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장용수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바짝 붙어서 한 노인이 따르고 있다. 흰 셔츠에 진한색 바지를 입은 노인의 머리는 백발이었지만 몸은 꼿꼿했다.
그러나 떨어진 곳에서 보아도 불안한 태도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대진이 칸막이 위로 상반신을 드러내고 손을 들었다.
장용수가 금방 알아보더니 곧장 다가왔다. 이대진은 노인이 그의 앞에 설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검은 피부에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이었지만 노인은 이대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이 세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간절한 분위기로 전해져 왔다. 바짝 다가선 노인이 습기가 배어있는 눈을 더 크게 떴다.
"선생이 대사관에서 오신 분이오?"
노인이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묻자 이대진은 돌덩이처럼 단단한 노인의 손을 잡았다.
"아닙니다. 대사관의 연락을 받고 민간단체에서 왔습니다."
"나는 제2사단 17연대 수색중대 제1소대 3분대 소총수 김성복 상병이요."
노인이 숨도 쉬지않고 말을 이었다.
"내 군번은 2274185, 1950년 8월 21일, 화천 전투에서 부상했다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목이 메인 이대진이 머리만 끄덕이고는 노인의 손을 끌어 자리에 앉쳤다. 50년 전의 일이었다. 노인은 소속과 군번을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장용수와 최씨가 탐색하듯이 그들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으므로 이대진이 헛기침을 했다.
"요리와 술을 더 시킵시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