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전여옥 '퓨전 레스토랑 유감'
기사입력 2000년 02월 02일 14시 03분
내게 가장 최고의 순간을 묻는다면 두말않고 맛있는 것을 먹는 순간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좋은 포도주와 흥미진진한 대화를 곁들여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진정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을 만끽한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가면 아무리 고된 일정이라도 나는 살이 포동포동 암팡지게 쪄갖고 돌아오는 사람이다. 현지의 맛있는 음식을 거의 탐험과 도전의 수준으로 맛보고 오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식문화도 아주 수준이 높아졌다. 그래서 이정도의 음식이면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프랑스요리와 이태리요리, 중국요리를 맛볼 수가 있다. 굳이 호텔에 가지 않아도 요즘은 특색있는 레스토랑문화가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 특히 나같은 사람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가격이 음식을 배반할 때이다. 돈은 비싸게 받으면서 음식은 형편무인지경인 경우이다. 특히 최근 이른바 퓨전레스토랑이 그렇다. 외국의 퓨전레스토랑은 아주 캐쥬얼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온갖 호사와 폼을 재며 먹는 레스토랑이 되어버렸다.
웬만한 퓨전레스토랑을 거의 다 섭렵한 바에 따르면 정말로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우선 섞인다는 것은 대단한 창조력을 요하는데 대개 섞어도 너무 단순하게 섞는다. 익힌 패주 몇개에 우메보시 소스를 얹어 퓨전냉채라고 이름붙인다. (음식맛도 웬만한 중국집 수준에 머무는데 지독히 적은 양과 비싼 가격에 나는 그날밤 열받아 잠도 못잤다)
즉 퓨전 레스토랑의 음식을 한번 맛보면 이것은 이렇게 만들었겠구나하는 레시피가 금방 입력되며 견적도 대충 나온다.
물론 나같은 미식가는 음식만 맛있으면 언제든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임에도 크레디트카드를 내는 손이 부르르 떨릴 지경이다. 왜냐면 우아한 식탁보값, 벽에 걸린 그림값, 희한한 접시값, 손님보다도 더 세련된 종업원들의 서비스에 낸 비용이 음식 그 자체를 서너번은 웃돌기 마련이다. 차라리 지저분한 중국집에 가서 던지듯 음식을 내는 곳이 백번 낫다.
무엇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건 데코레이션이다. 그냥 눕혀놓으면 될 아스파라거스를 세워놓는 값, 대충 채썰어도 대세에 지장없는 당근을 60센티정도 길게 오려 둥굴둥굴하게 만든 값 등 이 엄청난 데코레이션비용이 퓨전퓨드의 값을 올려놓는 것이다.
미식가로서 외치고 싶은 것이 있다. 제발 양심을 되찾으라고. 한번 치고 빠지는 음식점이 아니라 역사에 남을 음식점이 되라고 그러려면 적당한 가격과 높은 품질 밖에 그 답은 없다. 퓨전레스토랑의 대각성을 촉구한다.
[방송인 satvki＠chollian.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