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경리씨 시집 '우리들의 시간' 출간
기사입력 2000년 01월 23일 15시 14분
`글기둥 하나 잡고/내 반평생/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스치고 부딪치고/아프기만 했지/그래,/글기둥 하나 붙잡고/여까지 왔네'(`눈먼 말' 중)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74)가 시집 `우리들의 시간'(나남출판)을 냈다. 90년대 발표한 신작시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예전 작품들을 모았다. 박경리 시전집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시는 무엇일까. "내 경우 시는 창조적 작업이기보다 그냥 태어난다는 느낌"이라면서 "바라건대 눈감는 그날까지 내게서 떠나지 않고 내 생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박씨는 이 시집에서 삶의 허름한 모퉁이를 돌고, 막막한 벌판을 지나며 느낀 이런저런 생각들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있다. 할머니가 손자손녀 머리맡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옛날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다.
따라서 그의 시는 일반적인 시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다. 때로 어색한 표현도 많다. 그러나 노작가의 삶의 고백을 듣는 것으로,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시집은 문학, 일상, 환경 등을 나타내는 작은 묶음으로 구성돼 있다. 외로움, 고독같은 정서가 전편에 걸쳐 흐른다. 오랜 세월 홀로 삶을 꾸려온 탓이리라.
그는 `닭모이 주고 물 갈아 주고/개밥 주고 물 부어 주고/고양이들 밥 말아 주고/연못에 까놓은 붕어새끼/한참 들여다본다'(`아침' 중)고 일상을 소개한다. 그 갈피엔 혼자 밥을 차려먹고, 마당에 나온 뱀을 직접 쫓아내야 하는 고독도 스며 있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얼핏얼핏 내비친다.
그러나 `비리와 횡포가 난무하는' 세태를 꼬집는 매서운 비판, 문명 비평가로서의 면모는 여전하다. 환경, 생명에 대한 외경도 곳곳에서 보여준다. 근작시일수록 더 확연하다. `쇠붙이를 물리치고 합리주의의 사슬을 풀자'고 외친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꼿꼿하다. 그러나 그보다 친한 이웃집 할머니처럼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임정식기자 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