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음모 (17)

기사입력 2000년 01월 10일 12시 57분

이대진이 전화기를 귀에 붙였을 때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조건을 받아 들여요."

"예?"

"일본 은행의 보증건 말이오. 그만하면 되었어."

"저, 실례지만."

"회담 끝나고 말씀드리지. 차분하게 진행하세요."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으므로 이대진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뭐라고 합디까?"

강철민이 웃음띤 얼굴로 이대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맞춰 볼까요?"

"그럼 받아들이겠습니다. 두달 후에는 보증서를 주겠다는 각서를 계약서에 추가해 주십시오. 그리고 대금지급은 일시불로 해야됩니다."

정색한 이대진이 말하자 강철민이 머리를 끄덕였다.

"해 드리지. 그리고 차관급 회담 말인데 예비회담의 한국측 대표는 우리 의사를 가감없이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소. 한국의 박동기나 우리 공화국의 조경택같은 사람은 앞으로 배제하잔 말이오."

듣고 있을 한국측 요인들에게 하는 말이었겠지만 긴장한 이대진은 머리를 끄덕였다. 강철민이 말을 이었다.

"북남 관계를 개인이나 어떤 집단의 공적을 쌓는데 이용하면 안됩니다. 이해하시겠소?"

그러자 이대진이 노트를 덮고는 강철민을 바라보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북한의 체제부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한테 하시는 말씀은 아닐테지만 듣기 거북합니다."

이대진이 반쯤 엉덩이를 들고 일어섰을 때 강철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선생은 아주 강골이시군."

"이런 좌석에는 맞지 않는 성격입니다. 가도 좋겠습니까?"

"만나서 반가웠소."

따라 일어선 강철민이 손을 내밀었다.

"이선생이 마음에 들었소."

김경희도 일어섰지만 이대진에게는 손을 내밀기는 커녕 시선도 주지 않았다. 방을 나온 이대진이 호텔의 로비로 들어 섰을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의 벨이 울렸다.

핸드폰을 귀에 붙였을 때 예상 했던대로 김재선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형,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방으로 전화하신 분이 누굽니까?"

"이 사업의 책임자십니다. 이형도 곧 만나게 되실겁니다."

그리고는 김재선이 낮게 웃었다.

"놀라셨지요? 하지만 잘 하셨어요. 특히 북한 체제에 관련된 발언은 더욱."

"TV에 나가도 될까요?"

그러자 김재선이 다시 웃었다. 이대진이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6시 30분이었다. 책상에 앉았을 때 오성호가 다가와 섰다.

"보스, 은행에다 손을 좀 써야될 것 같은데요? 내일 네고하려는데 선하증권을 받지 못해서 이달 실적에 차질이 날 것 같습니다."

"얼마나?"

"150만 달러입니다."

이대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각 팀은 연간 목표대비 실적의 평가를 받는 한편으로 월별 평가도 받는 것이다.

150만 달러가 다음달로 이월되면 다음달에는 물론 전체 1등을 하겠지만 이달 순위는 20개팀 중 중하위권에 들 것이었다.

다음달의 예정된 목표만 그대로 채워도 3위 안에 들도록 맞춰져 있는 터라 1년 평균 순위 평가에 불리하다.

"좋아. 쥐약을 멕여."

뱉듯이 말한 이대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북한놈들 만나고 나서 양심이 조금 살아난 것같다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