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트소설] 통곡의 벽 (4)
기사입력 1999년 05월 12일 14시 37분
뭔가 섬뜩한 기운이 딸 아이에게 다가온 듯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딸 아이의 정신을 갉아먹는 듯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집에 있는 모든 박제를 모아 정원으로 가지고 나가 불태워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딸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며 까무러쳤다.
아내는 딸 아이를 꼭 껴안고 어쩔줄 몰라 울기 시작했다.
박제를 태워야만 했다. 박제가 딸 아이에게 안좋은 것들을 보이고 들리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딸 아이는 우황청심원을 먹고 아내의 품에서 살며시 잠들었다.
나는 정원에 그 박제를 한데 싸놓고 석유를 들이붓고 성냥불을 그었다.
어수룩한 밤. 날짐승들의 박제는 깃털을 쪼그려트리면서 활활 타들어갔다.
짐승의 역하게 타는 냄새와 석유의 끄을음이 콧속으로 빨려들어오고 있었다.
숲은 조용했고, 먼 곳 도로에는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간간히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검지와 엄지로 안경테를 살며시 올려젖혔다.
안경 유리 속과 내 눈동자 속에는 그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또렷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후 딸 아이는 얼마동안 그 이상한 아기의 울음 소리를 듣지도 보지도 않는듯 했다.
다시 전처럼 천진난만하고 생기발랄한 내 딸 아이로 돌아온 듯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후 딸 아이가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아, 아침을 먹고 딸 아이에게 심은 채소를 돌보자며 정원으로 나가자고 했다.
나는 딸 아이에게 물뿌리개에 물을 좀 담아오라고 시켰고, 딸 아이는 진청색 물뿌리개를 들고는 마당에 붙박혀있는 수도꼭지로 다가갔다.
나는 새로 나오는 파릇파릇한 새싹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난 듯 했다.
그러나 물뿌리개에 물을 담아서 가져올 딸 아이가 내게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딸 아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정은아！"
이미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린 물은 물뿌리개를 가득 채우고 넘쳐 흘러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런데 딸 아이는 꼿꼿이 서서 계속 수도꼭지가 붙박힌 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은아！ 정은아！ 왜 그래?"
나는 모종삽을 내팽겨치고 목장갑을 벗어던진 후 딸 아이가 꼿꼿이 서 있는 그 벽쪽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아가야, 아가…. 울지마, 울지…."
딸 아이는 벽을 보고 그렇게 말하면서 또 눈망울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딸 아이의 눈동자를 보고 또 벽을 보면서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이내 딸 아이를 두 팔로 번쩍 들어올려 내 가슴에 안았다.
"아빠, 너무 슬퍼요. 아가가 너무 슬퍼요."
딸 아이는 벽을 보고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계속]
글·이정우(하이텔ID:Vand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