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시사회] '브래스드 오프'
기사입력 1997년 06월 25일 14시 07분
동네 어귀에 나타난 곡마단의 나팔 소리에 가슴 들뜨던 어린 시절. 지금은 세파에 찌들어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조차 사치스럽지만 입을 불룩하게 내민 나팔수의 상기된 표정과 신명나는 리듬은 귓가에 아련하다.
또 고요한 밤하늘 멀리 어디선가 울려퍼지던 트럼펫의 외로운 선율에 목이 메이기도 했던 기억은 또 어떤가.
추억과 향수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다. 근래 들어 부쩍 우리 관객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영국영화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는 바로 이러한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브라스밴드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브라스밴드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은 영국정부의 폐광정책으로 위기감이 감돌고 있는 요크셔 탄광촌. 구릿빛 근육의 사내들이 낮에는 깜깜한 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캐고, 밤에는 브라스밴드의 멤버가 되어 금빛 찬란한 나팔을 불어댄다.
이름하여 탄광밴드. 감성에 호소하는 브라스밴드의 선율은 검은 땅을 위로한다. 비록 폐광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트럼펫이며 트럼본을 불어대는 순간만큼은 천상의 기쁨을 만끽하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붙은 폐광반대 낙서와 구호들 속에서 탄광밴드 멤버들은 여전히 악기를 둘러메고 연습장으로 모인다. 특히 밴드리더 대니（피터 포슬스웨이트）는 탄광의 정신을 구현해주는 것이 브라스밴드라고 생각하며, 탄광촌의 생명력을 대변해주는 것이라 믿고 있다.
하지만 폐광으로 인한 실업이 날로 확산되면서 밴드의 멤버들도 점차 열정을 잃어갈 무렵, 푸루걸혼을 꿈같이 부는 섹시한 연주자 글로리아（타라 피츠제럴드）가 나타나 밴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글로리아는 트럼펫주자 앤디（이완 맥그리거）의 어린 시절 연인.
글로리아의 가세로 탄광밴드는 전국브라스경연대회 준결승에서 우승하고 돌아오지만 탄광은 폐광으로 결정이 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밴드리더 대니가 진폐증으로 쓰러지고 런던 알버트홀에서의 결선행도 무산될 직전에 놓인다.
`브래스드 오프'의 힘은 이처럼 어두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영국영화 특유의 은근한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데 있다. 비록 현실은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근성의 메시지라고나 할까.
삶에 대한 깊은 페이소스, 기교보다는 솔직담백하게 그려낸 `사람들'의 이야기,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이완 맥그리거 등 탄탄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들의 가슴뭉클한 연기, 여기에다 정말로 빼놓을 수 없는 브라스밴드의 주옥같은 레퍼토리 `윌리엄텔 서곡'이라든가 `대니 보이' 등이 어우러져 `브래스드 오프'는 수작의 평가를 끌어냈다.
마크 허만 감독. （7월5일 호암아트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