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 (28)

기사입력 1997년 05월 28일 13시 49분


김준이 얼굴을 굳혔다.

"허나 머리가 가벼운걸 보면 네 오라비들과 다를바가 없다. 물러가라."

"아버님."

이제 김영의 얼굴도 하얗게 굳어졌다. 두눈을 치켜뜨고 있는것이 필사적인 모습이다.

"차라리 소녀를 죽여 주세요. 이재만과 혼인하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그렇다면 할수없지."

김준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손수 너를 베는수밖에."

청에는 그들 부녀 둘뿐이었고 주위는 조용했다. 김준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아느냐? 윤의충은 너같은 계집에 매어살 사내가 아니다. 네 유치한 풋정에 대의를 굽힐 사내가 아니란 말이다."

"…."

"또한 그자에게 너는 한낱 부스럼같은 존재일 뿐이야."

문득 김준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몸을 주었다구? 그래. 그자가 네 몸을 받은것은 분란을 피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김영은 마루바닥을 굽어 본채 눈물을 쏟았다. 아까부터 이를 악물고 있다.

김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자는 수십년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며 기회를 찾았고 이제 그 뜻을 펼칠수가 있게 되었다. 이 애비하고 뜻이 통하는 무장이다. 넌 비켜라."

"…."

"이재만의 안사람이 된다면 내가 베임을 당하더라도 말타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김준이 그녀의 숙인 머리를 바라보았다.

"돌아가라. 더이상 철없는 짓을 한다면 용납하지 않겠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준이 몸을 돌려 내실로 돌아왔다. 설렁줄을 당기자 한단이 소리없이 들어섰다.

시선을 내리고 있었는데 대청의 사연을 모두 들었을 것이다.

"혼인 날짜를 당겨라."

뱉듯이 말한 김준이 혀를 찼다.

"저년은 기질이 센것 같지만 정에 약하다. 난세에는 아주 쓸모없는 부류다."

"…."

"이재만이야 바람따라 눕는 풀잎같은 놈이지만 그 애비 이도명은 믿을수가 있어. 만일 일이 생긴다면 이도명이 수습을 할것이다."

"대감,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소이다."

한단이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심려가 깊으십니다. 그까짓 이씨 부자쯤은 무시해도 좋은줄로 아옵니다."

김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약해진 때문이 아니다. 매사에 방책을 세우는 습성 때문이지."

그시각에 거처로 돌아간 김영은 보료에 기대앉아 멍한 시선으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없이 벼르다가 겨우 말을 꺼냈는데 예상대로 혹독한 꾸중만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배려도 알수 있었다.

아버지는 신중한 사람이다. 일을 꾸밀때는 결코 내색하지 않다가도 터트릴때는 불길같이 일어난다.

이윽고 머리를 든 김영은 설렁줄을 당겼다.

곧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옥녀가 들어섰다. 김영의 몸종이다.

"아씨, 부르셨습니까?"

손끝을 까닥여 그녀를 가깝게 다가오게 한 김영이 목소리를 낮췄다.

"위사장 휘하에 만척이라는 별장이 있다. 그사람 더러 내가 은밀히 만나잔다고 전해라. 알아들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