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 (8)

기사입력 1997년 05월 07일 14시 42분


어깨를 부풀린 배중손이 칼자루를 쥐었다.

"모두 아녀자와 아이들인데 쇠사슬로 묶어놓아 그대로 몰사를 했소이다."

윤의충이 사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디서온 누구이며 어디로 가려고 했느냐?"

다시 몽골말이다.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실토하면 살려 보내겠다."

그러자 오른쪽의 얼굴이 긴 사내가 입을 열었다.

"소인은 쓰시마의 수호 소스케국 일족으로 아오키라 하오."

고려말이었으므로 주위의 군사들이 모두 긴장을했다.

"남송의 계산까지 가는 길이었소."

윤의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고려인은 어디서 잡았느냐?"

"잡은것이 아니라 샀소이다."

사내가 이제 초조한 시선으로 윤의충을 올려다 보았다.

"소인은 이제까지 한번도 고려국을 노략질한적이 없소. 고려국을 다녀간 자들한테서 샀을 뿐이오."

쓰시마는 대마도인데 소스케국이 영주로서 통치하고 있다. 아오키는 영주의 가신일 것이다.

햇살이 등뒤에서 솟아 올랐다. 윤의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놈들은 다친자의 등을 치는 놈들이다."

그의 시선이 옆에선 구광에게 머물렀다.

"모조리 죽여라."

"예, 장군."

기다렸다는 듯이 칼의 손잡이를 움켜쥔 구광이 한걸음 나섰다.

"장군, 약속이 틀리지 않소?"

아오키가 소리친 순간 배중손의 칼날이 날았다.

선수를 빼앗긴 구광이 다른 사내의 목을 치고는 칼을 치켜들었다.

"잡은 놈을 모두 죽여라！"

윤의충은 몸을 돌렸다. 뒤쪽에는 호장이 주민들을 이끌고 서 있었는데 모두 듣고 보았다.

"모두들 수고했다."

그들앞에 다가선 윤의충이 호장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찬데 바닷속에 들어갈수 있겠느냐?"

호장이 서너번 눈을 끔벅이더니 머리를 숙였다.

"분부만 하옵시오. 장군."

"저 배에 놈들이 지닌 양곡이 있을것이다. 젖기전에 꺼내어서 나눠 먹어라."

"예, 장군."

"그리고 고려인 아녀자와 아이들의 시체가 있다. 그것도 거둬주도록."

"예, 장군."

"서둘러라."

이미 윤의충의 말을 모두 들은터였다. 미처 호장이 입을 떼기도 전에 주민들은 다투어 바다로 달려나갔다.

아녀자도 있고 아이도 있다.

추위가 대단했지만 망설이는 사람은 없다.

윤의충이 문득 손을 뻗어 옆을 스치는 아이의 덜미를 잡았다.

아이가 놀란듯 눈을 치켜떴지만 곧 멈춰섰다. 어제 저녁밥을 먹인 김복이다.

"너도 어젯밤에 싸웠느냐?"

"예, 장군. 저는 징을 쳤습니다."

아이가 소리치듯 대답했다.

"그리고 소리도 질렀습니다."

"장하다."

"칼이 있었다면 사웠을 것입니다."

"힘을 기르면 쥐거라."

"예."

"네 어미를 지켜라."

"예."

힘차게 대답한 아이가 주민들을 쫓아 바다로 달려갔다.

겨울 햇살이었으나 제법 따스한 빛이다. 칼자루를 쥔 윤의충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번 싸움에서는 칼한번 휘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대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