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씨 서울 안착
기사입력 1997년 04월 20일 16시 28분
북한 노동당의 황장엽 전 국제담당 비서(74)가 한국으로의 망명요청 67일만인 20일 오전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남북 분단이후 한국 망명에 성공한 북한 인사 가운데 최고위급인 황씨는 측근인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사 김덕홍 전 총사장(59)과 함께 필리핀을 떠난 지 3시간여만인이날 오전 11시38분 한국과 필리핀 양국 관계자들이 동승한 가운데 에어 필리핀 전세기편으로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일원에 대한 삼엄한 경계경비로 긴장감이 팽팽한 가운데 황씨 일행을 태운 특별기가 도착하자 필리핀 보안당국의 호송책임자인 리바르네스 준장이 항공기 트랩밑에서 가디아 주한 필리핀대사에게 황, 김 두 사람의 신병을 인계했으며, 이어 가디아대사는 영접행사장에 나온 이병기 안기부 2차장에게 이들의 신병을 넘겼다.
특별기가 계류장에 도착한 직후인 오전 11시50분께 김씨와 함께 특별기 트랩 위에 모습을 드러낸 황씨는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한 뒤 트랩을 내려갔으며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고 망명 성공에 대해 감격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황씨는 도착 직후 「서울도착 인사말씀」이란 제목의 성명을 통해 『나의 청원을 허락해주고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돌려주고 따뜻이 맞이해준데 대해 대한민국 정부와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고 망명 소감을 밝혔다.
황씨는 또 『북조선은 사회주의와 현대판 봉건주의, 군국주의가 뒤섞인 기형적체제로 변질됐고 경제 전반적으로 마비상태에 들어가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해놓았다고 호언장담하는 나라가 빌어먹는 나라로 전락했다』며 『북조선은 그럼에도 개혁개방과 남조선과의 대화를 거부한 채 전쟁준비에 계속 몰두하고 있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명백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이 모든 사태를 외면한 채 수십년간 북조선 당국의 고위간부로서, 내외에 많은 벗을 갖고 있는 학자로서, 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친구를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 생각은 끝없이 복잡하고 고민은 비길 데 없이 심각했다』며 『그러나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다 합쳐도 7천만 우리 민족의 생사운명과 바꿀수 없다는 양심의 명령, 그리고 남쪽 형제들과 손잡고 전쟁을 막아보는 길 밖에 없다고 확신하게돼 대한민국에 오게 됐다』고 망명동기를 밝혔다.
황씨는 『나는 이미 민족앞에 큰 죄를 지었으며 부끄럽기 그지없다』며 『남쪽 동포들이 허락만 해준다면 힘을 합쳐 전쟁도발을 막고 우리 민족을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 바침으로써 조금이나마 민족 앞에 속죄할 수 있게 되기를바란다』고 말했다.
행사장에는 황씨의 평양상업학교 동창인 류창순 전통일부총리와 전중윤 이북 5도민회장, 임노춘 평양상업 동창회장등이 미리 나와 황씨 일행을 맞았으며 황씨가 총장으로 재직할 당시 김일성대학의 제자인 현성일, 최수봉, 최세웅, 신영희씨 부부가 황씨에게 환영의 꽃다발을 증정했다.
황, 김씨는 성명을 낭독한 뒤 간단한 기자회견을 갖고 『 여기오기까지 두달 남짓동안 서울에 도착할 수 있겠는지 걱정이었으나 지금 서울에 도착하니 정말 감개무량하다』며 『 건강상태는 매우 좋으며 앞으로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황씨 등은 곧바로 검은색 그랜저 승용차에 분승한 채 관계기관 요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공항을 떠나 안기부로 옮겨졌다.
황씨는 이후 안가에서 종합건강진단을 받은 뒤 관계기관의 조사를 거쳐 내달 중순께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망명 동기와 경위 등을 구체적으로 밝힐 예정인 것으로알려졌다.
한국 정부는 지난 1월말∼2월초 일본 방문을 마치고 2월11일 귀국하기 위해 북경에 도착한 황씨가 다음날인 12일 자신의 심복인 김씨를 대동하고 주중 한국총영사관을 찾아 망명을 요청하자 중국 당국과 외교교섭을 벌인 끝에 제3국을 통해 황씨를 데려오기로 합의했었다.
정부는 이에 따라 지난달 18일 황씨를 필리핀으로 옮기고 그동안 필리핀 정부의보호아래 한국행을 준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