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암투 (17)

기사입력 1997년 04월 13일 14시 51분


"네가 오해를 하고있는 모양인데."

김영이 이를 드러내고 소리없이 웃었다.

"난 집안의 분란을 막기 위해서 이러는게야. 너 때문에 아버님과 오라비 사이에 불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

"과연 필부로구나. 내가 몸을 열어 주었다고 정에 연연해서 이러는것 같으냐?"

다시 소리없이 웃고난 김영이 몸을 돌렸다. 그녀가 담장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을때 만척이 다가왔다. 시치미를 뗀 얼굴이다.

"장군, 박오돌이 기다리고 있소이다."

머리를 끄덕인 윤의충이 발을 떼었다.

박오돌은 도감밖의 나무 그늘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다가온 그들을 보자 퉁기듯이 일어섰다.

어둠속에서 그의 두눈이 들짐승처럼 반짝였다.

"장군, 문안드리오."

만척과 함께 바위산에서 야적질을 하던 사내였는데 체구가 작지만 날렵하다.

다가선 윤의충이 그를 바라 보았다.

"별고 없느냐?"

"불러주셔서 고맙소이다."

그는 진주부의 역졸 출신이다.

군이 쳐들어왔을때 병마부사 최돈이 재물을 꾸려 도망치자 그는 하인 세명을 죽이고 재물을 강탈했던 전과가 있다.

"너는 대장군 임연 사저의 하인이 되어야겠다."

윤의충이 바짝 다가섰다.

"대장군을 염탐하는 것이야. 특히 좌별초의 낭장 두천과의 관계를 알아내라."

"교위님 한테서 대강 들었소이다."

"두천의 반역은 틀림없다. 허나 대장군이 연루되어 있는지를 알아야겠어."

"엄청난 일이오이다. 장군."

박오돌은 나이가 사십이 다 되었다. 전란통에 온갖것을 겪은 때문으로 백년묵은 구렁이 같다.

옆에 선 만척이 입을 열었다.

"대장군의 집사는 재물을 밝히는 놈이야. 사금 한줌만 주면 하인으로 받아 줄것일세."

"한줌씩이나?"

눈을 둥그렇게 뜬 박오돌이 머리를 저었다.

"쌀 한줌도 귀한데 어찌 그리 말하시오? 반줌만 주리다. 나머지는 내가 먹고."

"자네한테는 따로 줄테니 그걸로 사람을 사귀어. 티내지 말고."

"내가 집구렁이요. 그런 걱정 마시오."

집구렁이는 집이 무너지거나 불이 났을 때에야 몸체를 드러낸다. 그의 별명이다.

묵직한 사금 주머니를 받아쥔 박오돌이 밤바람 처럼 사라졌다.

윤의충이 별을 올려다 보았다. 자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오늘밤 내륙으로 떠난다."

혼잣소리처럼 말하자 만척이 바짝 다가섰다.

"장군, 따르겠소이다."

윤의충이 머리를 저었다.

"안된다. 너는 남아서 구광이와 박오돌이를 단속해야겠다."

"이번에는 무슨 일입니까?"

"말할수 없다. 도감에는 병으로 사흘을 쉰다고 올려 놓았다."

밀행이다. 만척이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장군, 무사히 다녀옵시오."

"내 목숨은 이미 대감께 바쳤다."

"소인은 장군께 바쳤소이다."

두눈의 흰창이 더욱 드러난 얼굴로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소인에게는 대감은 물론 왕도 안중에 없소이다. 그저 장군께서 가시는대로,하시는대로 따를 뿐이외다."

윤의충이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떠날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