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31)
기사입력 1997년 03월 25일 14시 49분
세곡선은 두척이 매어져 있었는데 한척에는 불빛이 환했다. 갑판위를 몽골군이 바쁘게 오가며 짐을 내리는 중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등에서 걷히는 세곡은 대개 해상통로를 이용하여 로 올라왔지만 양광도 등 내륙의 세곡과 공물은 한수를 타고 올라 에 닿는다. 따라서 한수의 하류 근처에 위치한 남포는 물산의 집하장이 되어 있었다. 파도가 세곡선의 뱃전에 부딪치며 흰 거품을 내었다. 바위 사이로 만척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포구 주위를 돌아 보고 오는 길이다. "몽골군 장군의 인솔로 병사들이 500이 넘게 와 있소이다." 윤의충의 옆에 쪼그리고 앉은 그가 얼굴의 물기를 손바닥으로 닦았다. "세곡선 한척은 광주목의 영기(令旗)를 달고 있습니다. 공물을 싣고 왔다가 몽골군에게 뺏기는 모양이오." 윤의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세곡선은 100보쯤 앞의 방파제 안에서 파도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상판이 넓고 바닥이 얕은 하천용 세곡선이었지만 500석선(船)으로 쌍돛이다. 몽골군은 10인대가 1조가 되어 세곡선 주위뿐만 아니라 포구 전체를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30∼40명 정도였던 몽골군이었다. 왕창국은 해로를 봉쇄하여 로의 탈출을 막으려는 것이다. "세곡선을 타는 수밖에 없다." 바위틈에서 몸을 세운 윤의충이 만척과 구광을 내려다 보았다. "파도가 높지만 조류를 타면 강화의 남단에 닿을 것이다." 구광이 머리를 저었다. "난 헤엄을 못하우." "배에 꼭 붙어만 있어." "싫소." 그러자 만척이 혀를 찼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 있거라. 날 밝고 파도 그치면 몽골놈 더러 배 태워 달래여." "이런 쳐죽일." 벌떡 일어선 구광이 이를 드러내면서 눈을 부릅떴다. "이 야적놈이 감히 누구더러." "그만둬라." 윤의충의 호통에 구광이 이를 감췄다. 만척과 구광은 이제까지 서로 말도 나누지 않았다. 구광은 만척이 야적노릇을 하던 부랑자라고 깔보았고 만척은 구광을 역적 역관놈에 빌붙어 호의호식 하던 놈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넌 내 뒤에만 붙어. 그럼 된다." 앞장을 선 윤의충이 던지듯이 말하자 하는 수 없다는듯 구광이 따라 나섰다. "내가 매미유? 붙어있게?" 방파제 안쪽의 물속으로 들어선 그들은 목만을 내놓고 세곡선을 향해 다가갔다. 방파제가 막고 있었지만 안쪽의 파도도 높았다. 구광이 금방 물을 뒤집어 쓰더니 서너모금 물을 삼키고는 네다리를 휘저었으므로 윤의충과 만척이 달려들어 몸을 세웠다. "고려인 치고 헤엄질 못하는 자가 없다." 구광의 한쪽팔을 낀 만척이 말했다. "아무래도 네놈은 잡종이여." "이 야적놈." 그러나 입만 움직일뿐 구광은 몸을 맡기고 있다. 세 사내는 점점 세곡선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