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7)
기사입력 1997년 02월 27일 13시 41분
"대인, 소인은 진주목사 휘하에서 대정으로 있었소이다. 이름은 만척이오." 골짜기의 입구였다. 윤의충을 따라나온 사내가 호소하듯 말했다. "동경 싸움에 차출되었다가 유수병마사 휘하의 낭장이 도망치는걸 쏘아 죽이고는 이곳으로 흘러들었소. 내 목숨을 거두어 주옵시오." 윤의충이 걸음을 멈췄다. 이미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으므로 사내의 얼굴에는 두눈의 흰창만 드러났다. "암습(暗襲)을 하느냐?" "그렇소이다. 허나 본래 궁사였소. 오십보 거리의 달리는 짐승은 꼭 맞춥니다." "기르는 소나 도야지겠지." "도야지를 잡은 적은 없소이다." 조금 분위기가 풀어졌다. 윤의충이 바위 모서리에 걸터앉자 만척은 땅바닥에 앉아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윤의충이다. 교정도감 나으리의 밀사다." 윤의충이 낮게 말하자 만척이 다시 두손으로 땅바닥을 짚었다. "과연, 그러실줄 알았소이다. 장군." "교위다." "상관없소이다. 장군." "유수병마사 휘하의 낭장이 죽었다. 그 범인을 잡아 베려고 왔다." "알고 있소이다. 소문은 왕창국의 양자 도태일의 짓이라고도 하고 역관 황판의 짓이라고도 합니다." 윤의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모두 벤다." "두놈 모두 수하가 백여 인이오." "칼날을 두어번 갈면 될 것이다." 만척과 헤어진 윤의충이 예빈관에 도착한 것은 한식경쯤 후였다. 예빈관은 본래 성종이 세운 문하성의 별채였는데 본채가 모두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고 남은 건물은 객잔으로 변경한 것이다. 주인은 역관으로 몽골군을 따라 다니다가 퇴임한 정금(丁金)이다. 그는 몽골제국의 고관들과 친분이 많은 사내인데다가 사위가 몽골인으로 호부의 관리였다. 위세가 대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관을 지난 윤의충이 마악 이층 계단을 오르려는 때였다. 이층에서 몽골군 장교 두명이 내려오고 있었다. 가죽모자에 흰 깃털을 꽂았고 가죽 가슴가리개에는 철망이 씌워져 있다. 전투복장의 십인장(十人長)급이었지만 위세는 한인의 백인장(百人長)이상이다. 그들은 윤의충의 앞을 가로막고 멈춰섰다. "당신이 쿠타이인가?" 콧수염을 기른 왼쪽 장교가 불쑥 물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무장한 군사 대여섯명이 어느 사이에 뒤에 붙어 서 있었다. 윤의충이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불손한 놈. 십인장 주제에 거들먹 거리지 마라." 낮았으나 날카로운 몽골말에 그들은 제각기 주춤하는 기색이었다. 윤의충이 가슴속에서 제표를 꺼내들었다. "나는 토우루이 집안 사람이다. 지금은 중서성 상서 아율태의 집사다." 장교들의 얼굴이 놀람으로 굳어졌다. 토우루이 집안이면 전대황제 몽케와 현황제 쿠빌라이를 배출한 가문이다. 장교들은 일제히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몰라 뵈었소이다." "밀행이다. 상서께선 극비로 다녀오라 했는데 낭패다." 제표를 집어넣은 윤의충이 혀를 찼다. 제표는 진품이었다. 다만 사람이 틀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