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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 전쟁은 인간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갈등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출시가 2년 이상 미뤄졌던 '스토커(S.T.A.L.K.E.R.) 2: 초르노빌의 심장부'가 지난 21일(한국 시간)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우크라이나 게임사 GSC 게임 월드가 선보인 '스토커 2'는 이 회사가 2007∼2009년 선보인 '스토커' 3부작의 15년 만에 나온 정식 후속작이다.
전쟁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스토커 2' 안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제작진의 진중한 고찰이 담겨 있다.
◇ 불친절하고 우중충한 '스토커 2'의 세계
'스토커 2'는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황폐화된 초르노빌(체르노빌의 우크라이나어식 표기) 일대를 배경으로 한다.
'존'(Zone)이라고 불리는 게임 속 초르노빌은 방사능의 여파로 각종 돌연변이 괴물과 초자연적인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봉쇄 구역이다.
플레이어는 기회를 찾아 '존'에 들어온 주인공 '스키프'의 시점에서 제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용병·군인 집단 사이의 각종 의뢰를 해결하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든 배신자를 추적하고, 그 뒤에 도사린 음모를 밝혀낸다.
게임 속의 초르노빌은 한없이 불친절하고 우중충한 세계다.
도처엔 잘못 걸리면 즉사하는 이상 현상, 대처법을 모르면 눈 뜨고 당해야 하는 강력한 괴물들이 초반부터 플레이어를 맞이한다.
이따금 '에미션'이라는 붉은 안개가 '존'을 뒤덮기도 하는데, 빨리 실내로 대피하지 않으면 곧 목숨을 잃는다.
총기는 발에 챌 정도로 흔하지만 정작 총알은 적을 쓰러뜨려도 십수 발밖에 구하지 못할 정도로 귀하고, 상인한테서 구입하기엔 은근히 가격이 비싸다.
반면 대부분의 전투는 일대 다수로 펼쳐져 비축한 자원을 소모하도록 유도한다. 적 캐릭터들의 행동 패턴 역시 플레이어가 엄폐물에 숨으면 칼같이 수류탄을 던지고, 산개해서 양방향으로 포위하는 등 지능적이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조금만 게임에 적응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전방을 경계하고, 늘 부족한 물자를 찾아 헤매면서 게임 속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 모든 적에게는 이름이 있다
'스토커 2'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진중하다.
요즘 서구권 게임에서 자주 보이는, 과장된 유머로 분위기를 띄우거나 자꾸 플레이어를 '가르치려고' 드는 유형의 캐릭터는 '스토커 2'에 없다.
'존' 속의 삶에 찌들 대로 찌들었거나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들뿐이다.
전투가 단순한 재미 요소이자 목적이었던 기존의 1인칭 슈팅게임(FPS)과 달리, '스토커 2'의 총격전은 그 이상의 풍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이다.
게임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인간 캐릭터에게는 제각기 고유의 이름이 있다.
모닥불 앞에서 만날 수 있는 마을 사람부터 산탄총을 든 강도, 중무장한 군인, 심지어 시체로만 만날 수 있는 캐릭터까지 모두 제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얼굴도 조금씩 다르게 생겼다.
이는 플레이어가 필연적으로 쏴 죽여야 하는 적조차 단순한 표적이나 아이템 공급원이 아닌, 나름의 사연과 욕망을 가진 '사람'임을 생각하게끔 한다.
적이 단순히 '노상강도', '경비병' 같이 규격화된 캐릭터로 묘사되는 기존의 오픈월드 게임과 비교해 보면 사소하지만 큰 차이점이다.
게임의 주인공도 적들과 비교해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동일한 규칙을 적용받는다.
과도하게 개인에게 천착하지도, 그렇다고 게임 속에서의 삶과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도 않는 제작진의 철학이 담긴 대목이다.
◇ 전쟁통 속 독창적 영역 개척한 제작진…완성도 확보는 숙제
게임의 몰입감은 흠잡을 데 없지만, 정작 게임플레이 경험을 방해하는 것은 기술적인 요소다.
최적화에 문제가 있는지, 권장 사양을 크게 웃도는 PC에서도 게임이 툭툭 끊기는 일이 잦다.
자잘한 버그도 많다. 사물의 표면 텍스처가 깨진 채로 번쩍거리거나 처치한 적의 시체가 들썩거리는 현상이 꽤 잦았는데, 맨 처음에는 이 또한 게임 속에 나오는 이상 현상 중 하나인 줄 알았다.
긴 교전 거리와 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캐릭터의 동작이나 표정 연기도 다소 어색하다.
부실한 최적화와 버그가 발목을 잡으며 '스토커 2'는 종합 게임 평점 사이트 '메타크리틱'에서 70점대의 저조한 점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커 2'는 기존 오픈월드 슈팅 게임들과는 차별화된 독창적 세계를 구축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했다.
현대 비디오 게임이 갈수록 '무국적화'되는 경향 속에서도, 이 게임은 우크라이나 제작진이 겪은 현실 속 정서를 고스란히 반영하며 특별한 메시지를 전한다.
"…대부분의 영화나 TV 시리즈, 게임은 사람들이 일상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우리 게임은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현실의 어려움을 반영해, 인생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저 삶을 살아가고 그 과정을 소중히 여길 뿐이다."(마리아 그리고르비치 '스토커 2'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jujuk@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