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와, 도대체 이게 언제 유니폼인가요."
2002년 6월, 대한민국은 붉은 물결로 뒤덮혔다. 축구 변방으로 불리던 대한민국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축구 강호를 연달아 격파하고 '4강 신화'를 썼다. 그 중심에 바로 홍 전무가 있었다. 왼팔에 주장 완장을 달고 경기에 나선 홍 전무는 부드러운 형님 리더십과 탄탄한 수비 조직의 중심으로 팀을 이끌었다. 당시의 기억은 강렬하다. 미국 폭스스포츠 아시아판은 최근 역대 월드컵에서 가장 이름을 날린 베스트11 중 한 명으로 홍 전무를 꼽았다.
|
홍명보.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축구의 간판이다. 월드컵 출전 역사를 상징하는 레전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강하게 손사래를 친다.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에이스를 한 적이 없어요. 당연히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도 아니죠. 대학교 3학년 때는 졸업한 선배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미드필더에서 수비수로 전향해야 하기도 했어요. 태극마크도 대학교 4학년 때야 처음으로 달았어요. 그 전에는 16세 이하(U-16) 대표팀에 한 번 뽑힌 게 전부에요."
대기만성이었다. 그는 선수로서는 비교적 늦게 빛을 봤지만, 은퇴할 때까지 줄곧 정상에 있었다. 선수로서 무려 네 차례나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월드컵은 늘 새로웠어요. 새로운 룰이 생기고 이슈가 생겼거든요. 1990년에는 깜짝 발탁돼 조별리그 3경기를 다 치렀고, 1994년에는 수비수였지만 2골을 넣었어요. 프랑스월드컵 때는 대회 중간 감독님이 바뀌는 일도 있었어요. 2002년은 정말 좋은 기억이 많죠."
|
선수 은퇴 뒤에도 월드컵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2006년에는 코치, 2014년에는 감독으로 월드컵에 나섰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때도 현장에 있었다. 당시 올림픽대표팀 사령탑이었던 홍 전무는 현장에서 선수단을 점검했다.
지도자로서의 월드컵, 선수 때와는 또 다른 우여곡절이 있었다. 4년 전 브라질월드컵이 대표적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던 홍 전무는 큰 기대 속에 성인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국민적 관심이 쏠렸다. 냉철한 현실에 비해 홍명보란 이름으로 인한 기대가 과도했다. 일각에서는 16강을 넘어 8강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올림픽과 월드컵은 전혀 다른 무대였다.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1무2패를 기록, 최하위로 대회를 마쳤다. 비판과 비난이 쏟아졌다. 홍 전무는 모든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
"좋지 못한 성적을 냈어요. 감독으로서 결과에 대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사람들은 제게 실패했다고 했어요. 네. 하지만 저는 그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어요. 저의 그 실패를 다른 누군가의 성공을 위해 도와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홍 전무는 또 한 번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위치가 다르다. 그라운드 안이 아닌 밖이다. 홍 전무는 축구협회 전무라는 행정가로서 첫 월드컵을 치른다.
"원래 꿈은 행정가였어요. 그래서 일본, 미국에서 뛸 때 스포츠마케팅 공부를 많이 했죠. 꽤 오랜 시간 돌아오기는 했지만, 지난해 협회에 들어와서 8개월째 일하고 있어요.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밖과 안의 온도차예요. 현장과의 차이가 커요. 협회가 얼마나 유연성 있게 접근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소통을 많이 하고 있어요."
홍 전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야는 선수 육성이다. "목표는 확실합니다. 대한민국 축구의 발전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선수가 성장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적에만 연연하다보니 무조건 체격 좋은 선수만을 육성하죠. 축구는 대기만성 스포츠라고 생각해요. 이승우(20)처럼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보이는 선수도 있지만, 오반석(30)처럼 프로에 와서 성장하는 선수도 있어야 합니다."
최근 홍 전무가 이끄는 협회는 준프로 계약 제도를 도입하고, 8대8 축구 보급에 힘쓰는 등 선수 육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축구 미래의 먹거리를 위한 나무 한그루를 심고 있는 셈이다.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이지만 정작 현재에 발이 묶여 소홀해질 수 있는 일. 가장 중요한 일이 가장 급한 일이다. 한국축구의 미래, 학원 축구를 바라보는 홍 전무의 시각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빛이 나지 않을 일이지만 그는 미래를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현재에 머물러 있으면 향후 월드컵에서 좋은 소식을 만들어내기 힘듭니다. 좋은 선수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시기적으로 당장 신경써야 할 무대는 단연 러시아 월드컵이다. 홍 전무도 마찬가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그는 월드컵을 알리기 위해 인터뷰는 물론이고 각종 행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대회 기간 중에는 러시아에 머물며 대표팀을 독려할 예정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총회도 잡혀있다.
"더 떨릴 것 같아요. 저는 선수, 코치, 감독으로서 월드컵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그 상황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거든요. 역대 그 어느 월드컵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볼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 태극전사들이 최선을 다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 역시도 밖에서 열심히 응원할겁니다. 국민께서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흘렀다. 진지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임하던 홍 전무는 "기본적으로 인터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라며 웃었다. 하지만 그가 하고픈 말은 하나였다. "월드컵 붐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김진회 김가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