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이근호, 178만8000원의 인생역전 스토리

박상경 기자

기사입력 2014-06-19 06:22


2014 브라질월드컵 조별예선 H조 1차전 한국과 러시아의 경기가 18일 오전 (한국시간) 쿠이아바 아레나 판타날 경기장에서 열렸다. 한국의 이근호가 팀의 첫번째 골을 성공시키고 환호하고 있다.
쿠이아바(브라질)=최문영 기자 deer@sportschosun.com /2014.06.18/

늘 배가 고팠다.

1분이라도 그라운드를 마음껏 뛰는 게 소원이었다. 중·고교 시절 '볼 좀 찬다'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프로는 노는 물이 달랐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절치부심 끝에 K-리그 대표 공격수로 거듭났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 유럽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시련은 계속됐다. 월드컵의 꿈을 이루기 하루 전, 탈락 소식을 들었다. 귀국길에 훈련복을 쓰레기통에 던져놓고 울었다. 18일(한국시각) 브라질 쿠이아바의 아레나 판타날에서 펼쳐진 러시아와의 2014년 브라질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H조 첫 경기인 러시아전에서 후반 23분 호쾌한 오른발슛으로 골망을 가른 육군병장 이근호(29·상주),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불운의 아이콘

이근호는 중·고교 시절만 해도 특급 유망주였다. 고향팀 인천에 입단하면서 프로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조기입대 권유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2007년 대구로 이적, 2시즌 간 57경기에서 23골-9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대표 공격수로 거듭났다. 2008년에는 베이징올림픽 본선에 나갔다. 유럽 진출의 꿈을 꿨다. 하지만 스페인 프랑스 덴마크를 거치는 동안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상처만 받고 귀국해 J-리그 주빌로 이와타 유니폼으로 갈아 입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선 고비 때마다 한방을 터뜨리며 허정무호를 본선으로 끌고 올라갔다. 하지만 정작 본선 무대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최종엔트리에서 탈락, 전지훈련지인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왔을 때 훈련복 차림은 사복으로 변해 있었다. "공항에서 옷을 사 갈아 입은 뒤 비행기에 올랐다." 월드컵 출전의 꿈은 그렇게 무너졌다. 6개월 간 주변과 연락을 끊고 방황을 거듭했다.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렸다. 이듬해에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2012년 K-리그 울산으로 이적,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반전드라마였다. 하지만 여전히 월드컵의 꿈은 멀어 보였다. '국내용', '불운의 아이콘' 등 거북한 수식어가 이근호의 주변을 맴돌았을 뿐이다.

군대, 그리고 월드컵

2013년, 나이를 꽉 채우고 간 군대에서 새롭게 눈을 떴다. 수 억원에 달하던 연봉은 정확히 178만8000원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좌절과 아픔을 용기와 힘으로 바꾸는, 돈주고 살 수 없는 '군인정신'을 배웠다. 악몽같던 월드컵의 꿈도 다시 가졌다. 눈물을 땀으로 채웠다. 월드컵은 그렇게 악몽에서 환희로 탈바꿈 했다. 지난달 12일 파주NFC(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에 말끔한 군복 차림으로 월드컵대표팀에 합류한 이근호에게 4년 전의 기억을 물었다. "다 잊고 있었는데 기억이 나네요(웃음)." 이제는 추억이 됐다. 그만큼 의지도 남달랐다. "4년 전의 아픔 때문에 명단 발표 뒤 (이번 최종명단에) 탈락한 선수들이 더 생각났다. 그 선수들의 몫까지 책임감을 갖고 뛰겠다."

훈련에 목숨을 걸었다. 매일 자신을 채찍질 했다. 미국 마이애미 전지훈련 기간 단 한 번도 제대로 웃지 못했다. 월드컵 본선만 바라봤다. 그라운드를 누비는 상상을 하며 골을 넣는 이미지트레이닝을 수만번 반복했다. 월드컵은 몸값이 수백억원인 천재들의 무대다.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4년 전 이미 깨달았다. 이근호는 "내가 90분이 아닌 30~40분을 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90분을 뛰는 것과 똑같이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다. 남들보다 2배 이상 뛴다는 마음가짐이다." 이근호의 브라질월드컵은 간절했다.

악몽은 끝났다


러시아전 후반 10분, 홍명보 월드컵대표팀 감독의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꿈에 그리던 월드컵 무대에서 골이 터지기까지 13분 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센터서클에서 잡은 역습 기회, 상대 수비진이 우물쭈물 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치고 들어갔다. 골문을 힐끗 쳐다본 이근호는 아크 오른쪽에서 오른발슛을 날렸다. 연봉 300억원을 받는 이고리 아킨페예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볼은 거짓말처럼 아킨페예프의 장갑을 맞고 골문 안으로 넘어갔다. 연봉 780만유로(약 108억원)의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망연자실한 사이, 연봉 178만8000원의 이근호는 그라운드를 질주했다. 0의 행진에 야유를 퍼붓던 브라질 현지인들의 열광에 '거수경례'로 답례를 했다.

"상상이 현실이 됐다." 이근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감격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사실 동료에게 패스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슈팅 훈련에서 좋았던 감이 갑자기 생각나 그대로 찼다"고 득점 상황을 설명했다. "(골을 넣은 뒤) 그냥 아무생각 없이 달렸다. '김연아 세리머니'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거수경례는 생각이 나더라(웃음)." 자만하진 않았다. 1대1 무승부의 아쉬움이 남았다. "내 득점이 결승골이 되지 못해 아쉽다. 다가오는 알제리전을 잘 준비해 승리를 얻고 싶다."

좌절과 눈물로 쌓아올린 꿈은 기어이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꽃을 피웠다. 드라마 같은 이근호의 반전 스토리가 2막에 접어들었다.
쿠이아바(브라질)=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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