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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축사부일체]⑮이근호의 축구인생 '반전드라마' 만든 신호철 감독

하성룡 기자

기사입력 2014-05-30 07:05


2014년 1월, 동기생인 이근호 백종환 하대성(왼쪽부터)이 모교인 부평동중학교를 찾아 신호철 감독(왼쪽에서 두 번째)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신호철 감독

드라마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할수록 흥미롭다. 축구선수의 인생도 드라마와 닮았다.

'이글' 이근호(29·상주)의 축구 인생은 '반전 드라마'였다. 중·고교 시절 특급 유망주로 각광받던 그는 프로 입단 이후 자리를 잡지 못하다 2군리그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하며 K-리그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일본 J-리그에 진출해 전성기를 달렸다. 하지만

2010년 남아공월드컵 최종엔트리에서 탈락하며 다시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좌절하지 않았다. K-리그에 복귀, 아시아축구연맹 MVP를 수상한데 이어 2014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 무대를 누비게 됐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이근호의 드라마같은 축구 인생, 그의 반전스토리는 한 스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택의 기로에 선 제자가 찾아올 때마다 길을 제시해 준 신호철 부평동중 감독(46)이다.


1998년 부평동중 1학년 당시 대회에 출전해 드리블 돌파를 하고 있는 이근호. 사진제공=이근호
지도자가 필요 없는 선수

신 감독은 이근호의 중·고등학교 은사다. 1998년 동막초등학교의 공격수 이근호를 신 감독이 부평동중학교로 스카우트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중학생 이근호를 3년 동안 지도했던 신 감독은 이근호가 부평고 2학년에 재학중이던 2002년, 부평고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근호가 국가대표로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고, 축구인생 희로애락도 모두 함께 했다. "그렇게 만나는게 쉬운건 아닌데…." 옛 기억을 떠올리는 스승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근호의 학창시절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고 했다. "지도자가 필요 없는 선수다." 신 감독의 설명이 이어졌다. "근호는 지금 프로에서 하는 그대로 중·고등학교 때 훈련했다. 멘탈이나 승부근성이 워낙 좋아 지도자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스스로 자신을 컨트롤하고 훈련했다."

이근호는 중·고등학교 시절 최전방 공격수로 전국 대회에서 이름을 떨치며 특급 유망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동창인 하대성(29·베이징 궈안) 백종환(29·상주)과 함께 부평동중-부평고의 전성기를 열었다. 2003년에는 전국대회 3관왕까지 이뤄냈다. 이근호의 성장은 신 감독의 조련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는 "근호는 어렸을때 워낙 피지컬이 좋았다. 스피드가 좋고 저돌적이라 중학교때는 혼자 공격을 다해도 상대가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는 팀플레이가 필요했다. 근호에게 동료들을 이용하는 플레이를 가르쳤더니 습득을 빨리 했다. 이해력이 빠른 선수라 가르치기가 쉬웠다"고 말했다.


1999년 부평동중 2학년 당시 인천광역시 고육감기 초중고축구대회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고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는 이근호(오른쪽에서 두번째) 사진제공=이근호

2000년 인천 대표로 선발된 부평동중이 일본에서 교류전을 가졌다. 경기전 기념 사진을 찍고 있는 이근호(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인생을 바꾼 선택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 입단한 이근호에게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2군을 전전했다. 2006년 재기를 꿈꾸던 그는 인천의 2군리그 우승을 이끌고 MVP까지 수상하며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인천에서 그의 미래는 어두웠다. 구단으로부터 "입대를 하는게 어떻겠냐"라는 권유를 듣고 고민을 거듭했다. 그때 이근호는 신 감독을 찾아갔다. 속내를 털어 놓았다. 이근호는 "감독님, ○○이나 ○○으로 이적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신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근호야, 지금 네가 1군에서 경기를 못뛰는게 힘든건데 그 팀으로 가도 경기에 뛸 가능성이 적다. 너를 잘 아는 지도자가 있고, 1군 경기에 뛸 수 있는 팀으로 가라. 그 팀에서 네 모습을 찾는게 먼저다." 신 감독은 변병주 감독이 이끌던 대구FC를 추천해줬다. 제자는 스승의 조언에 따랐다. 이근호는 2007년 대구로 이적했다. 새 길이 열렸다. 축구에 눈을 떴다. 이근호는 대구에서 2시즌 동안 57경기에 출전해 23골-9도움을 올리며 K-리그 대표 공격수로 성장했다. 2009년 시즌 후 J-리그(주빌로 이와타)에 진출했다. 2012년에는 울산으로 복귀,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우승 및 MVP를 수상하며 아시아 정상 선수로 발돋움했다.


4년 전 약속 지킨 제자


2010년 남아공월드컵 최종엔트리가 발표되고 신 감독은 수 많은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다. 그의 제자인 김정우(32·알 샤르자) 조용형(31·알 라이안) 김형일(30·포항)이 남아공월드컵 최종엔트리에 포함됐다. 그러나 신 감독은 웃을 수 없었다.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맹활약한 이근호가 최종엔트리에서 탈락해 오스트리아 전지훈련지에서 귀국하던 날이었다. 제자가 마음에 걸렸다. 스승의 충격도 컸다. "근호가 공항에서 바로 일본으로 갔다. 차마 전화를 하지 못하겠더라." 일주일에 2~3번씩 통화를 하던 스승과 제자는 이후 6개월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신 감독은 이근호가 스스로 마음을 치유하면 전화를 할 것이라 믿었다. 6개월 뒤 이근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감독님, (탈락 당시에는) 제 자신이 너무 싫었어요. 주위에 있는 모든게 싫어서 한국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지금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시 시작했어요. 6개월만에 마음을 다시 잡게 됐습니다." 이근호의 목소리를 들은 신 감독은 가슴속 뜨거운 울림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근호에게 힘을 북돋아줬다. "근호야. 처음의 너를 다시 찾아라.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것 뿐이다. 다시 일어서는거야." 이근호는 "네, 다시 일어서겠습니다"라며 신 감독과 굳은 약속을 했다.

좌절은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4년간 뜨거운 눈물과 땀을 흘린 이근호는 마침내 브라질월드컵 최종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생애 첫 월드컵 출전으로 비운의 꼬리표를 뗐다. 5월 8일 최종엔트리에 이근호의 이름이 오르자 신 감독도 가슴속으로 울었다. 29일, 신 감독은 출국을 하루 앞둔 이근호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한 번 응원을 보냈다. 그는 "근호에게 '4년의 아픔과 세월이 너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다치지 말고 즐기는 축구를 하고 와라. 느낌이 좋아 골을 넣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며 통화 내용을 전했다. 제자도 씩씩했다. 이근호도 "몸 상태가 좋아서 느낌이 와요"라며 신 감독에게 웃으며 답했다.

이근호의 인생 드라마는 이제 새 막을 열 준비를 마쳤다. 브라질월드컵에서 그는 어떤 스토리를 써내려갈까. 뒤에서 묵묵히 응원을 보내는 신 감독은 '해피 엔딩'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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