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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축사부일체] ⑪'멀리뛰기 선수' 곽태휘의 영화같은 이야기

김성원 기자

기사입력 2014-05-26 07:33




"딱 떨어지는 순간에 못 일어나더라. 엄살 부릴 놈이 아닌데. 어떤 지도자든 월드컵에서 제자가 뛴다는 것은 영광이다. 마음이 오죽했겠느냐…." 목소리가 떨렸다.

2010년 5월 30일이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최종엔트리 발표직전, 허정무호는 벨라루스와 평가전(0대1 패)을 치렀다. 제자는 주전 중앙수비수로 한 자리를 예약했다. 그러나 전반 30분 상대 공격수 비탈리 로디오노프와 충돌한 후 시계는 멈췄다. 허망하게 그라운드에 앉은 그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나, 별 것 아니야. 일어나." 기자는 허정무 감독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허 감독의 고성이 숨죽인 그라운드를 깨웠다. 그러나 왼무릎에 손을 갖다 댄 그는 허공을 주시했다.

곽태휘(33·사우디아리비아 알 힐랄), 서른 살이 넘은 홍명보호의 유일한 노장이다. 드디어 꿈을 이뤘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 승선했다. 4년이 흘렀지만 그의 '원조 스승'인 곽병유 대구공고 축구부 부장(55)도 그 날의 아픔을 떨칠 수 없었다. 홍명보 월드컵대표팀 감독이 8일 최종엔트리 발표 기자회견장에서 "곽태휘"를 호명하자 만감이 교차했다. '드디어 됐구나', 밤잠을 설쳤다.


高1 멀리뛰기 선수가 웬 축구!

곽 부장은 1986년 대구공고의 사령탑에 취임했다. 2009년 제자에게 지휘봉을 넘겨줬다. 사령탑으로 첫 인연이 신태용 전 성남 감독(44)이었다. 대구공고 축구부가 창단된 후 첫 전국대회를 제패했다. 정상은 달콤했다. 그러나 대구공고를 받쳐줄 중학교 축구부가 없었다. 그 맛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의 수혈이 절실했다.

1997년 7월이었다. 경북 칠곡 왜관 출신인 한 멀리뛰기 선수가 축구를 하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곽태휘였다. 그는 왜관중을 졸업한 뒤 왜관의 순심고에 입학했다. "중학교 축구부가 없다보니 대구와 경북 일원에서 선수를 육성해야 했다. 왜관에 아마추어 멀리뛰기 선수가 있다고 해 한 번 오라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인 곽태휘가 처음으로 축구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잘 나가는 선수라면 꽃을 피우기 시작할 나이인 16세 때였다. "키가 1m80이 넘었다. 신체조건고 좋고, 스피드도 뛰어났다. 처음에 킥을 하는데 아주 매끄럽더라. 가능성이 보였다. 나도 곽가여서 왠지 모르게 정이 갔다. 항렬로 따지면 손자뻘이더라. 늦은 시작이지만 대표선수로 키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대구공고로 전학했다. '늦깎이'였지만 곽태휘의 꿈은 월드컵이었다. 곽 부장과 곽태휘의 궁합은 절묘했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었다. 축구는 또 다른 문제다. 곽 부장은 "멀리뛰기 선수 출신이라 점프력이 남달랐다. 헤딩만 두 달 시켰다. 그리고 드리블 훈련 등 기술 훈련으로 이어졌다." 곽태휘는 1학년 겨울방학 때 동계전지훈련을 거쳐 비로소 축구 선수로 모습을 갖췄다.



4년간 다닌 고등학교 그리고 실명

곽태휘는 2학년 때 경기에 투입됐다. 첫 경기는 여전히 곽 부장의 뇌리에 남아있다. "어리벙벙했지. 그래도 헤딩 하나는 잘하더라." 웃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를 기다린 것은 시련이었다.

경기 중 왼쪽 눈을 크게 다쳤다. 흐릿하게 보이는 실명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충주상고와의 경기였는데 태휘가 넘어졌다. 팔을 짚고 일어나는 순간 상대 선수가 킥한 볼이 그대로 눈을 강타했다. 서 있는 상태였다면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 충격은 더 컸다. 볼도 물을 머금고 있어서…"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결국 그는 눈을 치료하기 위해 휴학을 했다. 주위에선 다른 길을 모색하라고 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한 쪽 눈만으로 축구를 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또 흘렸다. 다행히 그는 다시 축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들이 3년 만에 끝을 내는 고등학교를 4년이나 다녔다.

말 못할 시련은 있었다. 고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라운드에서는 선후배가 없다. 타학교 후배들이 선배 대우는커녕 자존심을 건드렸다. "상담도 많이 했지만 그때 혼을 많이 냈다. 자신하고 싸워 이길 자신이 없으면 운동을 그만하라고 했다." 채찍이었지만 곽 부장도 마음속으로 울었다.

우여곡절 속에 또 성장했다. 오기로 무장했다. 곽 부장은 "그때부터 끝을 보려는 끈기는 누구도 못말렸다. 졸업 직전 울산에서 열린 전국체전 결승에서 울산 현대고와 맞붙었다. 아무래도 홈텃세가 작용한 것 같았다. 1-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곽태휘가 헤딩하는 순간 페널티킥이 주어졌다. 결국 승부차기에서 졌는데 태휘가 울면서 나오지를 않더라." 스승은 승부욕이 기특했다.


태휘야 드디어 월드컵이다

곽태휘는 고교 졸업을 앞두고 연세대, 고려대와 포항에서 영입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스승의 말을 따랐다. 중앙대를 거쳐 FC서울에 입단했다. 전남과 교토(일본), 울산, 알 샤밥(사우디아라비아)을 거쳐 알 힐랄에 안착했다. 곽 부장의 첫 제자인 신태용은 K-리그를 평정했지만 월드컵은 밟지 못했다. 곽태휘가 월드컵에 출전하는 첫 제자다. 스승의 바람대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공중볼 장악 능력과 노련한 경기 운영, 승부욕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감회를 묻자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자식이다. "월드컵대표팀에 뽑혀도 걱정은 뭐냐면, 혹시 연습과정에서 또 남아공처럼 그런 상황이 연출되면 안되는데 하는 것이다. 걱정반, 두려움반, 기쁨반이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단 5분을 뛰든, 10분을 뛰든 주어진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량만 발휘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나이도 있고, 젊은 선수들도 많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부끄럽지 않는 선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왼쪽 눈 실명 이후에 어깨, 허리, 무릎, 발목 등 부상이 끊이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오뚝이' 인생은 여기까지 왔다. 스승의 품은 따뜻했다. 곽태휘의 영화같은 스토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인 브라질이 클라이맥스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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