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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스토리-WHY]보이지 않는 손 "조광래 월급? 왜 줘?"

김성원 기자

기사입력 2013-01-18 08:29


17일 경남 진주 남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조광래 전 A대표팀 감독. 진주=김성원 기자

초야에 묻혔지만 14개월 전의 얘기를 다시 꺼내자 금세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의 이름이 다시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법적 소송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절박한 심정, 한국 축구의 서글픈 오늘이었다.

제52대 대한축구협회 선거로 축구판이 떠들썩하다. 여권인 정몽규 전 프로축구연맹 총재(51·현대산업개발 회장)는 현대가의 명맥을 잇기 위해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야권의 선두주자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67)은 현대가의 20년 한국 축구사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며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김석한 전 중등축구연맹 회장(59)과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51)도 '축구 개혁 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정몽준 명예회장(MJ)이 '축구 대권'을 잡은 것은 1993년이다. 영향력은 여전하다. 무려 20년간 현대가가 한국 축구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현대가 축구 권력의 가장 큰 피해자인 그는 흘러가고 있는 선거판이 쓸쓸하게 느껴질 뿐이다. 2011년 12월 기술위원회 논의없이 수뇌부의 밀실 야합으로 경질됐다. 설 곳이 없었다. 지난 연말 귀향을 선택했다. 1974년 대학(연세대) 입학과 함께 고향을 떠난 이후 38년 만이다.

조광래 전 A대표팀 감독(59)을 17일 경남 진주에서 만났다. 14개월 전 그 날의 악몽은 여전했다. "그 때 그 심정은…", 쉼표는 길었다. "내가 왜 대표팀 감독을 맡았는지 후회했다. 창피했고, 아팠다." 고개를 숙였다. 아픔이 컸다. 지난해 초 칭다오를 포함해 중국 클럽의 러브콜을 받았다. 평생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았지만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했다. 조 감독은 "대표팀 감독을 그만두고 지도자를 계속해야 할지 확신이 안 섰다. 그래서 못갔다. 아무 팀도 맡고 싶은 팀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질긴 악연의 끈은 진행형이다. 그는 현재 축구협회와 법적 소송을 준비 중이다. 칼은 그들의 몫이지만 계약은 계약이다. 지난해 1월부터 계약기간인 7월까지의 잔여 임금을 지급받지 못했다. 지난달 28일 잔여 임금을 지급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보냈고, 축구협회는 이제서야 협의할 생각이 있다고 짧게 답신했다. 그러나 알맹이는 없었다. 조 감독은 구체적으로 협의할 내용이 무엇인지 다시 물었다. 18일까지 축구협회의 답변을 다시 기다려 볼 참이다. 반응이 없을 경우 21일 법적 소송에 들어갈 예정이다.
'비겁한 줄다리기'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김주성 사무총장이 3차례 찾아왔다. 첫 번째 만남에서 코치들과의 임금 합의를 도와달라고 하더라. 코치들은 임금을 4개월 밖에 못준다고 했다. 그래서 '코치들이 어린애냐. 그들도 계약한 주체인데 내가 이래라, 저래라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코치들을 만나서 직접 얘기하라'고 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내 임금 얘기가 나왔다. '네가 직접 결정할 수 있는 문제냐'고 물었다. '감독님 임금인데 회장단에서 결정할 사항'이라고 대답하더라. 세 번째에선 국내 코치들과 똑같이 4개월치만 받으면 안되겠냐고 하더라. 화를 냈다. 그런 소리를 하려면 앞으로 전화도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일어나라고 했다." 돈 때문이 아니다. 축구협회의 악습이 반복되면 지도자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후배 지도자들의 권익을 위해서라도 타협할 수 없었단다. 김 총장은 현역 시절 '아시아의 삼손'으로 불린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조 감독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다. 하지만 축구협회는 한국인 코치와는 흥정을 했고, 브라질 코치와의 소송에선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한국인 코치에게는 4개월치, 가마 코치에게는 소송 끝에 7개월치 잔여 임금을 지급했다. 횡령과 절도를 한 회계직원에게는 1억5000만원의 퇴직위로금이 아깝지 않았지만 '괘씸죄'에 걸리면 계약서는 휴지 조각이 됐다. 한 번 눈밖에 나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축구협회의 생리였다.

조 감독은 자신의 잔여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임금 얘기가 나오자 '왜 줘'라고 얘기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 문제다." 그리고 "차기 회장은 '보이지 않는 손'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쉽게 아물것 같지 않던 조 감독의 상처는 아이들의 웃음과 축구를 향한 열정에 서서히 치유되고 있다. 조 감독은 지난해 11월 진주에서 '바르셀로나 조광래 축구교실'을 열었다. 축구교실을 연지 3개월, 그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새삼 지도자로 한 번 더 눈을 뜨고 있다." 모처럼 해맑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축구계의 소통과 화합을 물었다. 4년 전에도 그랬지만 이 문제는 이번 선거에서도 최대 이슈다. "그라운드에선 여야가 없다. 그것을 논하는 자체가 잘못됐다. 다만 이제는 젊고 세계 축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분들이 협회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축구협회장이 축구에 대한 깊이를 갖고 있어야 한다. 깊이를 갖고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하면 자연스럽게 소통과 화합이 이뤄진다. 사람이 문제다. 생각의 창의성을 불어넣으면 모든 것이 잘 정리될 것이다."

한 시간여에 걸친 인터뷰가 끝이 났다. 자리를 떠나며 그는 기자를 향해 "두 번 다시 나같은 지도자가 나오면 안된다"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 축구를 향한 이 시대의 울림이었다.
진주=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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