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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퇴 그날 밤' 단독으로 만난 허정무 감독 격정토로

박찬준 기자

기사입력 2012-04-11 09:42


허정무 감독. 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

귀를 의심했다.

10일 오후 4시쯤 허정무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57)의 자진사퇴 소식을 들었다. 계속된 악재에도 팀만 생각하겠다는 그였다. 지난달부터 허 감독 사퇴 소문이 돌때도 믿지 않았다. 이겨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확인을 위해 허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코치진들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 사이 소문은 계속해서 꼬리를 물었다.

무작정 광주전을 앞두고 인천 선수단이 합숙에 들어간 인천의 모 호텔로 달려갔다. 오후 7시 40분 허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경기 준비에 바쁜 사람한테 왜 자꾸 전화들을 해. 다들 내가 물러나길 바라는건지. 내일 사퇴 안하니까 걱정말고 있어." 기자를 안심시켰다. 허 감독의 목소리가 밝은 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허 감독은 찾아가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기자에게 "그럴 필요 없어요. 오면 안볼거야"라고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며칠전 전화통화가 계속 메아리쳤다. 호텔 도착 후 허 감독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문자 한통을 남겼다. '돌아갈까 하다가 얼굴 뵙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로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허 감독을 기다리던 중 김봉길 수석코치와 연락이 됐다. 로비에 내려온 김 코치는 "감독님에게 아무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 사실 사퇴설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이번에도 그냥 소문이라고 믿고 싶다"고 했다. 이어 "마음이 아프다. 감독님이 요새 너무 작아지셨다. 사람도 피하시고. 그래도 오늘 정상적으로 모든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니까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인천의 관계자와 최고참 김남일(35)도 합류해 허 감독의 사퇴 진위 여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오후 10시 허 감독이 호텔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잠은 다 잤네." 웃으며 기자 옆에 앉았다. 얘기를 빙빙 돌렸다. 물러날 것이라고 했지만 시점은 밝히지 않았다. 선문답이 오갔다. 10여분이 흘렀다. 앉은 자세를 고친 허 감독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광주전 후에 사퇴 기자회견을 할 생각이에요." 소문은 사실이었다.

허 감독이 '11일에는 물러나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말했다. "11일 아침에 선수들 얼굴 어떻게 보겠나. 경기까지 있는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나를 믿고 온 선수들도 많고. 너무 미안해서 조용히 물러나고 싶었다."

허 감독에게 솔직한 심경을 물었다. 그는 "시원섭섭보다는 담담하다"고 했다. 허 감독은 사실 오래전부터 사퇴를 결심했다고 했다. 축구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의욕적으로 도전했지만, 인천에서는 더이상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허 감독은 인천시에 통보한 뒤, 김현태 코치와 가족에게 사퇴 사실을 알렸다. 10일 오전 허 감독은 구단을 찾아가 사퇴 보도자료를 준비해달라는 부탁을 끝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선수단에게 알리기 전에 언론에 통보된 것이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허 감독이 사퇴를 결심하는데는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그다. 자신을 둘러싼 온갖 소문도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은 얼마든지 질 수 있다. 그러나 연봉까지 공개되며 나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너무 힘들었다"며 말끝을 흐렸다. 시와 구단에 대한 섭섭함이 클 법도 한데, 모두 내뱉지 않았다. 민감한 부분에선 말을 아꼈다. "물러나는 사람이 뒷 말을 남기는 것은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끝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에 대한 미안함만을 강조했다.

상처 입은 허 감독이지만 축구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대뜸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이 이끄는 애슬레틱 빌바오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잠이 안와서 새벽에 유럽축구를 자주 본다. 빌바오 축구가 참 매력적이었다. 그런 축구를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실업자 됐으니 유럽가서 경기보고 공부나 할려고 한다"고 했다. 유로2012도 직접 현지에서 관람할 계획이라고 했다. 허 감독은 "나는 축구쟁이다. 좋던 싫던 축구판에 계속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내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다시 명예회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준비하고 있어야지."

인천에서의 '유쾌한 도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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