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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육상]켐보이, '의리'와 '인내' 새기고 2연패

이건 기자

기사입력 2011-09-01 21:39


2011 대구세계육상대회 6일차인 1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자 3000m 장애물 경기에서 우승한 이지키엘 켐보이(케냐)가 국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대구=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

남자 3000m 장애물의 간판 스타 이지키엘 켐보이(29·케냐)의 마음 속에는 딱 두 단어가 박혀 있다. 바로 '의리'와 '인내'다.

켐보이는 늦은 나이인 18세 때 운동을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였다. 운동을 하다 실패한다면 이도저도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컸다. 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2000년부터 전업 선수로 전향했다.

그리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직접 자신을 팔러 나와야했다. 유럽의 육상 전문 에이전트들에게 편지를 썼다. 단 한명에게서만 답장을 받았다. 엔리코 디오니시였다. 그는 켐보이의 열정을 높이 샀다. 후원을 하겠다고 나섰다. 디오니시와의 단단한 우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유럽 굴지의 에이전트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하지만 켐보이는 자신을 키워준 디오니시를 버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함께 하고 있다.

영국의 도시 맨체스터와도 인연이 깊다. 켐보이는 2002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커먼웰스게임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자신의 국제대회 첫 메달이었다. 이를 기념해 자신의 아들이름을 키프로노 맨테스터 켐보이로 지었다.

2002년 켐보이에게는 돈을 많이 벌 기회도 있었다. 오일머니를 앞세운 중동국가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아프리카 선수들을 수입했다. 이 시기 귀화한 선수 가운데는 사이프 사이드 사힌(카타르)도 있었다. 켐보이에게도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라를 버릴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득이 됐다. 사힌이 카타르로 떠나자 켐보이는 안정적으로 케냐 대표로 나서게 됐다. 이는 2003년 올아프리카게임과 2004년 아테네올림픽 우승의 발판이 됐다.

인내의 결과가 달콤하다는 것을 아는 선수이기도 하다. 2005년 헬싱키 대회와 2007년 오사카대회에서 은메달에 그쳤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7위까지 떨어졌다. 현역 은퇴도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잡았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켐보이는 묵묵히 훈련에 매진했다. 좋은 결과가 찾아왔다. 2009년 베를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자신의 세계선수권회 첫 금메달이었다. 상승세를 탄 켐보이는 결국 대구에서 8분14초85로 2연패를 일구어냈다. 켐보이는 웃통을 벗고 엉덩이춤을 덩실덩실 추며 기쁨을 표현했다. 은메달은 케냐의 브리민 킵로프 킵투로가, 동메달은 프랑스의 마히딘 멕히시 베나바드가 차지했다.
대구=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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