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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닷컴 김영록 기자]'피고인' 엄기준이 주연 못지 않게 빛나는 역대급 악역의 면모를 새삼 입증했다.
막상 죽이겠다고 결심하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거침없고, 완전범죄에 가깝게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는 머리도 갖췄다. 행여나 자수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은 조금도 없다. 형 차선호 외에 부검의와 형의 내연녀 제니퍼 리(오연아) 등을 죽일 때도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대범하거나 혹은 꼼꼼한 일반적인 악역들과 달리 차민호의 캐릭터는 몹시 입체적이다. 첨단공포증에 시달리는 바람에 정체를 들키고, 누군가 자신을 추적하는 것을 알면 강도높은 불안에 시달린다.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도 뜨거운 파이프를 쥠으로써 자신의 지문을 제거하는 등 냉정한 면모가 있지만, 어처구니없는 사인 실수를 거듭하는 허술한 면도 있다.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 부하에게 고마워하는가 하면, 그녀가 누군지 알려준 나연희(엄현경)의 손을 붙들고 도와달라며 애원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내비쳤다.
차민호의 다층적 성격을 드러내는 엄기준의 디테일한 연기력이 돋보였다. 엄기준은 이날 형에 대한 컴플렉스, 자신의 정체를 위협받는 불안감, 차선호로서의 위선, 냉혹무비한 살인자, 살인 직후의 서글픔, 나연희에 대한 걱정, 박정우에 대한 집착 등 나약하고 소심하지만 잔인하기 이를데없는 차민호의 갖가지 표정을 생동감있게 표현해냈다.
어느덧 시청률 20%를 훌쩍 넘긴 '피고인'의 인기비결은 뭐니뭐니해도 사무치는 슬픔을 절절하게 토해내는 지성의 명품 연기다. 하지만 숨막히는 스토리와 대비되는 느릿한 진행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피고인'에서 엄기준의 열연 또한 그 인기를 지탱하는 한 축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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