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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조금은 거창하고 조금은 상투적이지만, 지창욱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대략 8개월 전 그의 이름 앞엔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그럴 만했다. 상대역이 하지원과 주진모였으니까. 과연 그 힘을 지탱해낼 수 있을런지. 시험대가 지창욱 앞에 놓여졌다. 그렇게 MBC 드라마 '기황후'의 캐스팅 막차를 탔다.
"타환을 만난 후 제 머릿속에 있는 황제의 이미지를 모두 지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신 타환이 처한 상황과 주변인물을 살펴보면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을까 계속 상상했죠. 성격이나 성향은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통해 형성되니까요. 그렇게 유추하면서 연결고리를 이어가다 보니 타환이 완성돼 가더라고요. 드라마 역사상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캐릭터는 없어요.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죠. 그래서 용상에 다리를 꼬고 앉아보기도 하고, 저 나름대로 새로운 표현을 찾고자 이런 저런 구상을 많이 해봤어요."
그의 이런 노력들은 철저히 대본을 기반으로 한다. 대사에 실린 감정 변화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계산해서 나온 연기. 감정적으로 고된 작업이었다. 원나라가 정복전쟁을 시작하고 5년이 흐른 뒤 반미치광이가 된 타환이 전쟁에서 패한 장군을 단 칼에 베어버리는 장면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롱테이크로 6시간 동안 찍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촬영이 끝난 후엔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촬영 전에 피곤해서 잠시 졸았다든가, 동료들과 장난을 쳤다든가 하면 연기에서도 드러나요. 시청자들은 몰라도 제 눈엔 그게 명확하게 보이더라고요. 중요한 장면을 앞두고는 단 한순간도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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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운에 빠져 있는 듯한 그에게 '기황후'가 남긴 의미를 물었다. 단박에 "재미있는 작업, 즐거운 기억, 좋은 사람과의 인연"이란 답이 돌아왔다. 하지원, 주진모, 조재윤, 이원종, 전국환 등 '좋은 사람'의 이름도 여럿 떠올렸다. '무사 백동수'와 '다섯손가락'에 이어 세 작품째 함께한 중견배우 전국환은 '쫑파티'에서 "이제 아버지라고 불러라. 그리고 내 딸 한번 만나볼래?"라고 가볍게 농담할 만큼, 아들처럼 사위처럼 지창욱을 아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하지원과는 유난히 사이가 좋았다. 드라마 초반 승냥과 타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로맨틱 코미디 같았는데, 의외로 이땐 서로 낯을 가려서 말 붙이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고민 끝에 대학 선배라는 구실로 첫 인사를 했더니 '아, 네'라는 답이 돌아와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웃었다.
'기황후'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시나리오와 CF모델 제안도 늘었다. 하지만 체감하진 못한다고 했다. "저를 찾아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만큼 거절하는 작품이 많아져 죄송하기도 하고요. 조진웅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어떤 작품을 거절할 땐 네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느껴야 한다, 누군가에겐 그 작품이 전부일 수도 있다.' 굳이 달라진 점을 꼽자면, 요즘 이 말을 실감한다는 것 정도인 것 같아요. '웃어라 동해야' 때도 그랬듯 '기황후'로 인생이 한번에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경험이 쌓이면서 달라지는 거겠죠."
마지막으로 8개월간의 대장정을 끝낸 자신을 위해 어떤 보상을 해주고 싶냐고 물었다. "여행도 가고 싶고, 며칠씩 뒹굴고도 싶고, 친구들과 진탕 술을 먹고 싶기도 하고,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허비하고도 싶고… 그런데 이 마음이 오래 못 가더라고요. 연기하고 싶어서 금세 몸이 근질근질해질 거예요.(웃음)"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