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야구대표팀이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차지 한 뒤 김경문 감독과 하일성 KBO 사무총장이 코칭스태프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스포츠조선DB |
|
"야구 몰라요"라는 명언을 남긴 명 해설가 하일성 전 KBO 사무총장이 세상과 이별했다. 하 전 총장은 8일 오전 자신의 사무실에서 숨진채 발견됐다. 향년 67세. 경찰은 자살로 추정하고 있다.
하 전 총장은 프로야구와 함께 하며 명 해설자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성동고 시절 야구에 입문해 경희대 체육학과에 야구 특기생으로 입학했지만 재학중에 야구를 포기했고, 체육 교사로 살았다. 그러던 중 1979년 동양방송 야구해설위원으로 처음 마이크를 잡았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KBS 해설위원으로 나서면서 최고의 해설가로 인기를 누렸다. MBC의 허구연 위원과 선의의 라이벌로 야구 대중화에 공헌했다. "야구 몰라요"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고인은 어려운 야구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재미있는 뒷 얘기를 풀어내 시청자의 눈과 귀를 잡아끌었다. 야구가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는데 큰 역할을 했다. 재미난 입담으로 많은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해 야구를 모르는 국민들에게도 친숙한 얼굴이었다.
'야구 해설가 하일성'은 야구 행정가로도 일했다. 2006년 5월 KBO사무총장에 선임되며 KBO리그를 이끌었다. 당시 현대 유니콘스 인수자를 찾는데 힘을 썼고, 많은 반대와 우려속에 지금의 넥센 히어로즈를 탄생하도록 했다. 한국야구가 세계 속에서 빛이 나도록 기틀을 잡은 이도 하 전 총장이었다. 2006년 젊은 선수 위주로 구성한 대표팀이 도하아시안게임에서 예상하지 못한 동메달로 '도하 참사'를 맞았지만, 오히려 이때 발견했던 문제들을 고쳐가며 현재 국가대표팀 체제를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대표팀 감독이 코칭스태프 회의를 거쳐 선수를 선발했으나, 이후 공식적인 기술위원회를 만들어 합리적인 선발체계를 만들었다. 고인은 당시 선수들이 스트라이크존이 달라 애를 먹은 것을 보고 KBO리그와 아마추어 야구의 스트라이크존 차이를 줄이려 했다. 또 공인구 역시 국제대회에서 사용하는 공과 비슷하게 만들도록 했다. 이런 노력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년WBC 준우승으로 이어졌다.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는 "내가 죽을 때 묘비에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단장'으로 써달라"고 말할 정도로 자부심을 가졌다. 이러한 국제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이 한국 야구 붐을 일으키게 했다.
2009년 3월 KBO 사무총장에서 물러난 뒤 방송계로 돌아온 고인은 지난 2014년까지 야구해설위원으로 활동한 이후 야인 생활을 하면서부터 힘겨운 날을 보냈다. 사기 혐의로 피소되기도 했고, 자신이 거주중인 양평의 주택을 경매로 내놓기도하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뜻하지 않은 소식에 야구계는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했다. KBO 사무총장 시절 사무차장으로 하 전 총장과 함께했던 이상일 전 KBO 사무총장은 "2∼3개월 전에 통화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경제적인 어려움을 토로하시더라"면서 "정말 야구에 열정적인 분이셨는데 안타깝다"라고했다. 그와 함께 시절을 보냈던 여러 KBO 관계자들도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의 숨은주역으로 하 전 총장을 꼽으며 "하 총장의 열정이 있었기에 금메달이 가능했다"라고 입을 모았다.
하 전 총장의 빈소는 보훈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10일 오전 10시. KBO는 8일 5개 구장에서 열리는 프로야구 경기에 앞서 전광판에 추모글을 띄우고, 고인을 기리는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권인하 기자 indyk@sportschosun.com
스포츠조선 바로가기페이스북트위터]
- Copyrightsⓒ 스포츠조선,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