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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선수로 살 수 있게 돼 행복합니다."
야구인생 '마지막' 만들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신인 때로 돌아간 것 같다"며 웃었다. 1군 마운드를 밟은 지 3년이 넘어 아예 새로 시작하는 것 같다고 했다. NC 유니폼을 입고 든 생각은 '친정 같다'였다. 김경문 감독을 비롯해 두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코치진이 많았다. 심리적 안정감도 생겼다.
야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소속 없이 1년을 보냈다. LG에서 나왔을 때 처음엔 잠시 좋았다. 자신을 향한 비난도 없었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혔던 통증과 이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지치기 시작했다. 밥도 동료들과 같이 먹고, 운동도 함께 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단체생활에 너무 적응이 된 나머지 모든 게 어색했다.
주변에선 '이렇게 끝내도 되겠나'란 말을 했다. 전성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절도 있었지만, '마지막'은 없었다. 박명환은 "프로 생활을 17년 했다. 그런데 마지막 3~4년은 대중들에게 잊혀진 채로 지냈다. 마지막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정리하고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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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의 결실은 분명했다. 지난 9월 각 구단 스카우트들을 대상으로 공개 테스트를 진행했다. 총 8개 팀이 박명환의 라이브피칭을 지켜봤고, 3개 팀이 박명환에게 영입 의사를 타진했다.
직구 최고구속은 140㎞. 전성기 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회복세가 보였다. 한 팀도 아니고 세 팀이나 러브콜을 보냈다. 박명환은 이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NC를 선택했다. 김경문 감독을 비롯한 익숙한 환경, 친한 선배 손민한이 앞서 재기에 성공한 사례도 있었다.
어깨와 맞바꾼 영광, 난 '앞'만 보고 달렸다
사실 박명환은 프로 4년차였던 1999년 처음 어깨를 다쳤다. 시범경기에 등판했는데 어깨가 아팠다. 하지만 진통제에 의지해 버텨왔다. 경기 전엔 2시간 동안 어깨 강화 훈련을 받은 뒤 진통제를 맞고 마운드에 올랐다.
결국 LG로 FA 이적한 뒤 어깨가 탈이 났다. 역대 투수 최고액인 4년간 최대 40억원을 받았지만, 순식간에 '먹튀'로 전락하고 말았다. LG 이적 첫 해 10승(6패)을 올린 뒤, 이듬해 수술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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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환은 "앞만 보고 달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는 "난 지나간 걸 후회하는 성격은 아니다. 바뀌는 게 없지 않나. 그때 상황에선 최선의 선택이었다"며 "LG에 갔을 땐 몸이 망가진 상태였지만, 예전처럼 몸이 버텨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깨 말고도 다른 잔부상이 나오면서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양치기 소년' 되지 않을 자신 있다
어깨 통증을 참은 대가로 영광을 얻었다. 우완 트로이카의 한 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2001년엔 우승반지도 꼈다. 박명환은 "어깨와 영광을 맞바꾼 셈이 됐다"며 웃었다.
팬들의 비난은 그에게 큰 상처를 줬다. 박명환은 "선수는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참고 한다. 하지만 그게 나중에 부상으로 터지면 비난이 돌아온다. 물론 비난도 관심이 있기에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억울한 부분도 있었다"고 했다.
LG 시절 재활군에 있을 때도 그렇고, NC에 와서도 박명환은 든든한 선배다. 후배들에게 항상 자신처럼 고생하지 말고, 젊었을 때 자기관리를 잘하라고 충고한다.
박명환은 "난 한창 야구가 늘어야 할 시기를 흘려 보냈다. 나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한다"며 "민한이형처럼 재기하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복귀하는 (신)윤호형이나 (김)수경이도 잘 준비해서 1군 마운드에 섰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사실 자신감이 없어서 인터뷰를 꺼렸다. 팬들에게 양치기 소년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몸이 되니까 자신감이 생겼다. 첫 단추를 NC에서 잘 꿴 것 같다. 내 야구인생의 마무리는 이제 시작이다"라고 했다. 박명환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창원=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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