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원하늘숲길트레킹

스포츠조선

'청주대첩'의 주인공 정순현의 복싱 인생

최재성 기자

기사입력 2018-06-22 10:08

<조영섭의 복싱 히스토리> 12. '청주대첩'의 주인공 정순현의 복싱 인생

오늘 복싱 히스토리 주인공은 두 차례나 동양챔피언을 지낸 정순현(천안농고-인천체대)입니다. 70년대 프로복싱 최대 이변의 경기로 손꼽히는 77년 7월 주니어페더급 한국 타이틀전(청주)에서 챔피언이자 국가대표 간판스타인 고생근을 KO로 잡으며 신데렐라로 급부상한 주인공이죠.


◇현역 시절의 정순현.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1952년 천안시 성환읍 태생인 정순현은 천안 계광중학교 시절 핸드볼 선수로 활약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복서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순발력과 민첩성 등의 밑그림이 이미 이 시기에 형성되었죠. 복싱으로 방향을 전환한 정순현은 천안농고 재학시절인 70년 전국학생선수권 라이트플라이급 결승에서 이상덕(원주 대성고)에게 패했지만, 초접전을 벌였고, 이후 꾸준히 충남 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하는 등 성과는 있었지만, 동향의 염동균, 정상일에 비해 크게 주목받는 복서는 아니었죠. 24세 때인 75년 7월 재대 말년에 프로 데뷔전을 치른 정순현은 4번째 경기인 한국타이틀전에서 최영철에게, 9번째 경기인 동양타이틀전에서 필리핀의 릭 키하노에게 각각 판정패하며 기대치를 밑돕니다.

그러다 맞이한 경기가 바로 '청주대첩'으로 불리는 한국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전이었죠. 전형적인 '화초복서' 고생근과 '잡초복서' 정순현의 운명적인 한판 승부가 벌어진 것입니다. 프로 데뷔 3년 6개월 만에 정상에 등극한 늦깎이 챔피언 고생근이 치르는 2차 방어전이었죠. 고생근은 당시 24전 22승(14KO승) 2패를 기록했는데 19전을 국제전으로 치렀을 정도로 베테랑이었습니다. 데뷔 후 4연속 KO 질주를 한 후 5전 때 72년 뮌헨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필립 와루잉게에 접전 끝에 신승하는 등 12연승(8KO승) 가도를 달리다가 WBC 플라이급 챔피언을 지낸 베니세 보코솔에 일격을 당해 브레이크가 걸려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전열을 정비하여 WBA 밴텀급 10위인 태국의 타놈지트 수코타이에게 4회 KO승을 이끌어내며 세계타이틀전에 포커스를 맞춘 엘리트 복서였죠. 그는 아마추어 시절에도 69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 금메달과 함께 대한아마복싱연맹 최우수복서, 70년 대한체육회 선정 우수선수, 71년 대통령배 밴텀급 우승에 이은 최우수복서, 71년 아시아선수권 우승, 72년 뮌헨올림픽 8강 진출 등 탄탄대로만 걸었습니다. 프로로 전향해서도 피스톤처럼 내뻗는 스트레이트가 날카로워 당시 기자들이 '면도날 펀치'란 수식어를 붙여줬을 정도였죠. 이 면도날 펀치에 66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금과 은을 획득했던 손영찬과 서상영을 비롯해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금메달 김태호, 염동균을 꺾은 백종우 등이 고개를 숙였죠. 동료 복서였던 염동균은 언젠가 필자에게 '고생근의 스트레이트는 눈앞에서 감지되다가 일순간 퍽하고 사라짐과 동시에 안면이 강타당하는 섬광 같은 펀치'라고 정의했을 정도로 발군이었습니다.


◇72년 뮌헨올림픽 복싱 대표 고생근.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이에 반해 정순현은 9전 7승 2패의 평범한 전적에다 당시 단 한 차례의 KO승도 없는 커리어였죠. 정순현을 비롯해 염동균, 최영철, 김광선, 김갑수 등과 38전을 싸웠던 베테랑 복서 유종태는 오래전 필자가 정순현의 권투를 평가해 달라는 물음에 "음~, 순현이 권투는 너무 단조로웠어. 원투밖에 때릴 줄 몰랐잖아. 게다가 펀치력도 부족했지"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듯 당시 정순현은 복싱에 눈을 뜨지 못한 새내기였죠.

정순현은 경기가 시작되고 예상대로 초반부터 고생근에게 면도날 펀치를 허용해 안면에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하지만 계체량에 실패한 여파 때문인지 갈수록 소진되는 고생근의 체력과 함께 무뎌진 면도날 펀치를 간파한 정순현은 6회 이후 적극 공세를 펼쳐 서서히 전세를 역전시켰고, 7회부터 직선(스트레이트)과 곡선(훅)이 하모니를 이룬 특유의 연타가 기관총처럼 불을 뿜기 시작합니다. 운명의 9회, 정순현이 혼전 중에 회심의 일타인 라이트훅을 던지자 이를 맞은 고생근은 마치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듯 천장을 응시하며 쓰러집니다. 동공이 풀린 채 가쁜 숨만 몰아쉬며 세대교체를 알리는 '카운트 아웃' 소리에 지그시 눈을 감습니다. 고생근으로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패였고, 승자 정순현으로서는 낭중지추의 면모가 세인들에게 서서히 각인되는 시발점이 된 경기였죠. 5년 후 벌어지는 황충재-황준석 전과 비견된 정도로 극적인 반전이 드라마틱하게 연출된 경기였죠. 이 경기는 정순현의 커리어에 중요한 변곡점이 됩니다. 하지만 고생근은 그 1패가 치명타가 되어 이후 마치 방전된 배터리처럼 무기력한 경기로 일관하다 1년 8개월 후 33전 29승(15KO승) 1무 3패의 전적을 남긴 채 소리소문없이 링을 등졌죠. 82년 황충재가 쿠에바스와의 경기가 무산되면서 맥빠진 상태에서 치른 경기가 황준석과의 경기였다면, 고생근은 77년 후앙 안토니오 로페즈와의 세계랭킹전이 무산되면서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서 치른 경기가 정순현 전이었다는 점에서 두 승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후 정순현은 당시 한화그룹 김종희 회장의 배려로 빙그레란 계열사에 취직, 생활이 안정되면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서들의 정신적인 안정은 비약적인 경기력 향상으로 직결되는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합니다. 괄목할 만한 급성장을 한 정순현은 4연속 KO 퍼레이드를 포함, 8연승 행진을 펼칩니다. 이 중에는 홍수환, 염동균, 고생근이 싸워 단 한 차례도 다운시키지 못했던 '터프함의 대명사' 다나카 지로라는 끈적끈적한 복서를 2회에 마치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이 쉽게 제압한 경기도 있습니다. 이 밖에 다나카 후타로, 가사하라 유 등 홍수환과 맞대결하여 마지막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치열한 타격전을 벌였던 일본의 정상급 세계랭커들도 연달아 정순현의 쇼트훅에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백기를 들고 말았죠. 특히 78년 1월, 당시 44전 41승(14KO승) 3패를 기록중이던 한 체급 위의 페더급 동양챔피언 황복수와의 진검승부에서 한 차례 다운을 잡아내며 승리, 고생근을 잡은 게 행운이 아니었음을 입증했죠. 정순현은 78년 2월 WBC 페더급 1위에 등극합니다. 남은 건 오직 하나, 세계 정상 정복이란 복서 최대의 과제였죠.


정순현은 마침내 홍수환을 누르고 챔피언이 된 WBA 주니어페더급의 리카르도 카르도나(콜롬비아)와 78년 11월 장충체육관에서 운명의 한판 승부를 펼칩니다. 당시 정순현은 17전 15승(6KO승) 2패였고, 챔피언 카로도나는 26전 19승(12KO승) 1무 4패였죠. 정순현은 신장과 리치에서 열세였지만,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도 굴하지 않고 유효타를 성공시키면서 선전합니다. 특히 9회에 회심의 카운터 펀치가 작렬하며 결정적인 찬스를 포착했지만, 흘러내리는 피가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고 맙니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홈링임을 감안하면 무난한 판정승이 예상되었죠. 하지만 경기는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순간이었죠. 와신상담. 7개월 후 같은 장소에서 정순현은 카르도나와 리턴매치를 벌이지만 또다시 분루를 삼킵니다. 팬들이 기억하는 정순현의 사실상 마지막 경기였죠.

32세가 되던 83년, 정순현은 34전 28승(17KO승) 6패의 전적을 남기고 정든 링을 떠났습니다. 일본 선수와 8차례 맞붙어 전부 KO승을 기록했고, 14차례나 각종 타이틀이 걸린 진검승부를 펼쳤으며, 6패조차도 전부 타이틀전에서 기록한 순도 높은 커리어에 그는 흡족해했습니다. 게다가 단 한 번도 KO패 당하지 않은 기록과 함께 동양타이틀을 통산 8차례나 방어한 업적도 가슴에 훈장처럼 간직하고 있더군요. 정순현에게 치명적인 2패를 선물했던 리카르도 카르도나는 2015년 10월 향년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득 인생이란 순환되는 삶 속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왼쪽부터 임종대, 정순현, 송광식.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정순현은 은퇴 후 서울 천호동과 안산에서 사업을 벌여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현재는 고향 천안에서 광민건설이란 건설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업하는 와중에도 83년 국가대표 송광식과 84년 MBC 신인왕 출신의 임종대 등 후배들을 초대해 만찬을 베푸는 등 복싱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죠. 송광식은 83년 킹스컵 선발전 페더급에서 신창석을 KO로 꺾고 우승하는 등 4체급에 걸쳐 국가대표 선발전 우승을 한 강타자이고, 임종대의 경우 정순현이 예전에 표명길이라는 복서의 매니저로 활동하던 시절 임종대가 7전 전승의 유망주 표명길을 제압하자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후덕한 인품을 지닌 정순현은 세월이 흘러도 후배들에게 한결같은 넉넉함과 포근함을 선물하는 선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스포츠조선 바로가기[스포츠조선 페이스북]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