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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장애라는 건 그냥 불편한 상태에 적응하고 하루하루 살아 나가는 것이지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장애인을 여러 시선으로 바라본다. 무시하고 차별하기도 하고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도 하며 대단하다고 감동받기도 한다. 어떤 대상을 접하고 어떤 감정이 드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나는 내가 그런 대상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위해 사는, 어딘가 불편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 한 인간일 뿐이다.'<김동현 '뭐든 해봐요' 프롤로그 중>
'뭐든 해봐요.'
김 판사는 부산과학고, 카이스트 출신으로 과학기술 전문 변호사를 꿈꾸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로 진학한 2012년 5월, 간단한 시술 중 시력을 잃었다. 의료사고였다. 창창한 청춘에게 닥친 깜깜한 시련. "빨리 회복해서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뭐 잘했다고 저러고 누워서 밥도 안 먹고 영양제도 안맞겠단다." 어머니가 누군가를 향해 한탄하는 소리를 듣고 다시 밥을 뜨기 시작했고,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였다. 어머니의 권유로 절에서 한달간 매일 3000배를 한 후 새로운 마음의 눈을 떴고 이후 10년 '뭐든 해보며' 담담하게 씩씩하게 살아온 그에게 스포츠는 아주 친한 친구다.
쇼다운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김 판사는 "너무 재미있다. '최후의 승부'라는 쇼다운의 의미대로 테이블 앞에만 서면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공이 골에 꽂힌 순간 환호하는 쾌감도 있다"며 미소지었다. "장애인, 비장애인,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다. 오락실 '에어하키'와 아주 비슷한데 눈을 가린다는 게 엄청난 차이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소리만 듣고도 공 위치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쇼다운에 꽂힌 김 판사는 평일, 주말, 낮밤 가리지 않고 훈련에 매진했다. 입문 1년 만인 2019년 5월 국가대표선발전에서 국대 에이스들을 줄줄이 꺾고 태극마크를 달았고, 2년에 한번 열리는 이탈리아세계선수권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입문 1년 만에 국가대표라니 엄청난 운동 재능이 내재돼 있었던 걸까. 김 판사는 "학교 다닐 때 탁구, 배드민턴, 테니스 조금씩 한 게 전부"라며 손사래쳤다. "쇼다운에 미쳐서 정말 엄청 열심히 연습했던 것같다. 기록경기가 아니다 보니 운도 따랐던 것같다"며 자신을 낮췄다.
김 판사의 이번 도전은 16강에서 멈춰섰다. "2020년 10월 (법관) 임용된 이후 아무래도 훈련시간이 부족했다. 어깨 부상도 있어서 많이 치질 못했다"면서 "그 사이 후배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저를 뛰어넘고 이제 제가 다시 도전자 입장이 됐다. 이젠 정말 쉽지가 않다"며 웃었다. 그는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동료들의 4강, 결승전을 응원하며 직관했다. "2019년 내가 국가대표할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선수들의 실력이 올라왔다. 작년에 이종경 선수가 스위스 취리히 오픈에서 사상 첫 우승을 한 건 실력이 다같이 상향평준화된 결과"라며 흐뭇해 했다. 이날 배출된 쇼다운 국가대표 남녀 6명 중 5명이 김 판사와 같은 '우리동작' 동호회 동문. 김 판사는 "'우리동작' 자랑을 좀 하자면 강윤택 센터장님이 야간, 주말에도 기꺼이 문을 열어주신다.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맘껏 연습할 수 있다. 쇼다운 동호인들에겐 내집과도 같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더 많은 이들이 '쇼다운'의 행복을 함께 나누길 희망했다. "쇼다운이 더 활성화됐으면 좋겠다. 시각장애인들이 도움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종목이 그리 많지 않다. 더 많은 분들이 이 종목의 매력을 알게 되셨으면 한다. TV, 미디어를 통해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제언도 아끼지 않았다. "저는 마라톤도 하고 있는데 마라톤 경우엔 가이드러너가 더 많아져야 한다. 장애-비장애인들이 함께 운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쇼다운은 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아지면 좋겠고 무엇보다 지도자 양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동작'에서 다들 열심히 치고 있는데, 전문 지도자가 상주하면서 지도해주는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다. 저희끼리 '집단지성'으로 치고, 심판 선생님들이 도와주시긴 하지만 전문적인 훈련을 위해서 코치가 꼭 필요하다. 쇼다운 전문지도자가 많이 양성되면 좋겠다"고 했다.
판사, 작가, 쇼다운 선수, 마라톤 동호인… 24시간이 모자랄 김 판사에게 스포츠란 어떤 의미일까. "스트레스를 확 풀게 해주는 친구같은 존재죠. 할 때 안 할 때 컨디션이 완전 달라요. 일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쌓이는 스트레스를 땀을 빼면서 날리죠." 내년 쇼다운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김 판사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럼요. 앞으로도 계속 나와야죠. 국가대표 도전은 언제나 진심이니까." 빛을 잃고, 스스로 빛이 된 '판사님'을 보면서 '뭐든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