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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주먹' 송광식이 링을 떠난 이유

최재성 기자

기사입력 2018-08-20 12:58

<조영섭의 복싱 히스토리> '핵주먹' 송광식이 링을 떠난 이유

얼마 전 지인들과 경기도 시흥에서 개최된 생활체육대회 참관차 경기장에 갔다가 80년대 초중반 페더급에서 웰터급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송광식을 만났다. 송광식을 보자 불현듯 83년 2월 강원도 원주에서 개최된 제9회 킹스컵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핵펀치를 선보이며 필자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줬던 그의 경기 영상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불과 4개월 전 인도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 12체급 중 7체급을 휩쓴 한국 아마복싱 무대에서 허영모, 문성길, 김동길, 정용범, 이해정, 김현호 등은 수성에 성공했지만, 김광선과 신준섭이 김유현, 김기택, 송광식 등 새롭고 참신한 얼굴의 대거 등장으로 인해 세대교체의 희생양이 된 대회로 기억된다. 당시 '베스트 복서'는 서울체고 졸업반인 이해정이 차지했으나, 중앙 무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송광식이라는 샛별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천안 청운실고 1학년이었던 송광식이 기존 대표들을 파죽지세로 쓰러뜨리고 대표팀에 합류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대 사건이었다.


◇국내 라이트급 챔피언 시절의 송광식.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태권도 공인 4단에 100m를 11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와 순발력으로 무장한 송광식이 준결승에서 국가대표로 4체급을 석권한 페더급의 절대 지존 신창석을 맞아 2회에 전광석화 같은 스트레이트 한 방으로 침몰시킨 장면은 압권이었다. 현역 국가대표 베테랑 신창석이 네 살 어린 고교 1년생에게 참패를 당한 것이다. 신창석이란 복서는 밴텀급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할 당시 문성길에게 치명적인 2패를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홍동식, 권채오, 박형옥, 권현규, 윤영환 등 간판급 복서들을 제압한 철권이었다. 때문에 그의 패배는 국내 아마추어 복싱사의 큰 이변 중 하나로 손꼽히기에 충분했다. 신창석은 81년 필리핀 마르코스배, 같은 해 태국 킹스컵, 이듬해 세계선수권(뮌헨)과 아시아선수권대회(서울)에 연달아 국가대표로 출전한 복서였다. 더욱이 라이벌인 돌주먹 문성길과의 총 3차례 맞대결에서 단 한 번도 다운을 당하지 않는 내구력을 자랑했던 신창석이 무너졌으니 그 경기는 사람들이 송광식을 핵주먹이라 부르는 이유가 입증된 한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진 결승에서도 문성길, 이현주, 전칠성, 권현규, 장성호 등과 어우러져 목포대 전성기의 한 축을 담당했던 권길문마저 3회 KO로 잡으면서 우승을 차지하자 당시 해설을 담당했던 노병엽 선생이 "한국에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감이 탄생했다"며 인상적인 멘트를 남겼을 정도로 송광식의 복싱은 강렬했다.

송광식은 대전 출신으로 국내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수남 관장이 운영하는 한밭체육관 소속의 복서였다. 한밭체육관은 세계 챔피언 염동균을 비롯한 김수원, 박일규, 오인석, 지택림, 한정훈, 김승택 등 수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한 사설 명문 체육관이다. 82년 천안 청운실고에 입학한 송광식은 그해 충남 신인대회와 전국 신인대회 페더급에서 우승과 함께 '베스트 복서'에 선정되면서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일천한 경력임에도 전격 출격, 대형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30년간 복싱 현장을 누벼온 필자가 보기에도 송광식처럼 초고속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케이스다. 56년 멜버른올림픽 밴텀급 은메달리스트인 송순천 선배가 129일 만에 태극마크를 단 신화에는 비견할 수 없을지라도 파격적인 발탁임에는 분명했다. 송광식은 4월에 벌어진 킹스컵에 출전해 인상적인 경기를 펼친 덕분에 그는 5월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챌린저대회에 참가한다. 챌린저대회란 국제아마복싱연맹(AIBA)이 2년마다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리지 않는 해에 신설한 대회로, 세계선수권자와 각 체급 유망주들이 진검승부를 펼쳐 새로운 선수권자를 뽑는 대회였다. 천하의 김광선과 문성길도 선발되지 못한 이 대회에 송광식은 정용범, 신준섭, 이성목과 함께 출전권을 획득하게 된다. 이 대회가 끝나면 아시아선수권대회를 비롯해 로마월드컵, LA올림픽 선발전 등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보다 내일이 기대되는 송광식으로선 그 대회가 복싱 흐름상 터닝 포인트가 될 중요한 무대였다. 하지만 82년 3월 전국 신인대회에서 우승한 후 11개월 만에 전격 소년등과(?)에 합격하여 선수촌에 입성한 송광식은 돌연 울타리를 넘어 탈출하고 만다. 아침 6시 기상과 동시에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에 정적은 여지없이 깨어지면서 시작되어 밤 10시가 되어서야 끝이 나는 '병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너무 이른 출세가 오히려 역반응을 일으켜 족쇄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와신상담하던 송광식은 한 체급 올려 전열을 정비한 후 84년 LA올림픽 1차 선발전에 라이트급으로 출전한다. 그리고 결승에서 전년도 로마월드컵 은메달리스트인 전칠성과 맞대결한다. 송광식은 묵직한 핵펀치를 내구력이 약한 전칠성의 안면에 폭발시켜 2차례나 휘청거리게 하는 등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판정 결과에 고개를 숙인다. TV로 생중계된 이 경기는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당시 그의 스승이었던 70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김충배 선생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라는 단말마 같은 한마디를 던지고 승복한다. 운도 따르지 않은 송광식이었다. 송광식은 최종선발전에서 진행범(한국체대)에게 패해 올림픽 출전의 꿈을 접는다. 그는 비록 패했지만, "진행범의 샘처럼 솟아나는 강철 체력에 밀렸다"며 패배도 깨끗이 인정할 줄 아는 사나이였다. 천부적인 재질의 복서 송광식은 돌덩어리에서 옥으로 진행되는 절차탁마의 과정을 묵묵히 견디는 끈기와 열정은 부족한 복서였다. 만일 송광식이 곰처럼 우직한 문성길 같은 성실성을 겸비했다면 한국 복싱 역사는 새로이 써야 했을지도 모른다. 자라나는 후학들이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내용이다. 86년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간 송광식은 이강석(한국체대)과 송형동(한국체대), 장세봉(충의 소년단), 박형일(인천대), 김태주(서원대) 등을 제압하며 라이트급, 라이트웰터급, 웰터급에서 국내 정상에 올랐지만, 메이저대회와는 인연이 없었다. 적당히 노력하면 적당히 보상받는다는 법칙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송광식은 88년 군 제대 후 8년 동안 98전 85승(69KO승) 13패의 화려한 아마추어 전적을 뒤로하고 프로로 진출하기 위해 동아체육관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김현치 회장 입회하에 테스트를 받는다. 상대는 동양챔피언 최연갑과 무승부를 기록했고, 세계 타이틀전을 치렀던 박찬목을 비롯해 홍성철, 김창룡 등을 꺾은 임동수라는 중견 복서였다. 당시 10승 1무 2패를 기록한 동양 페더급 1위 임동수는 테스트 경기에서 송광식의 라이트 일격에 힘없이 쓰러져 버린다. 말이 필요 없이 단번에 물건임을 알아본 김현치 회장은 차세대 챔피언으로 지목하고 머릿속에 챔피언 만들기를 위한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김득구가 정상 정복에 실패한 라이트급에서 송광식만한 재목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이가 비슷한 소속 체육관의 세계 챔피언 박찬영, 유명우 등과 친분도 쌓으면서 잘 적응해 나가던 송광식은 3개월간 트레이닝을 하면서 데뷔전을 준비한다. 아뿔싸. 그 순간 그의 스승인 이수남 관장에 의해 동아체육관에서 88프로모션 소속으로 전격 체육관이 옮겨진다. 그곳에서 프로 생활을 한 송광식은 89년부터 94년까지 5년 동안 전 WBC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김상현 트레이너의 지도하에 10연승(5KO)을 거두며 국내 라이트급 챔피언에 등극한다. 하지만 문성길, 김용강, 전칠성, 이경연 등 좋은 선수가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차가운 현실에 은퇴를 결심한다. 결국 소련 용병 나자로프와의 라이트급 동양 타이틀전을 마지막으로 소중했던 사각의 링의 추억들을 빗물 속에 흘려보낸다.


◇시흥시 체육회 복싱 감독으로 재직중인 송광식(왼쪽)과 김준연 회장.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이후 송광식은 경기도 시흥에 정착, 사업을 하면서 제4대 시흥시 체육회장을 거쳐 현재는 시흥시체육회 복싱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 인생 3회전에서 김준연 회장과 함께 뜻을 같이하여 복싱 발전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 한국 복싱에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싶다"고 역설한다. 요즘 인생은 삼모작이라 한다. 인생 일모작을 잘 살았다고 반드시 성공한 인생이 될 수 없다. 너무 많은 것을 일찍 이루면 후반에 이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마지막까지 가봐야 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하는 법이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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