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수감독의 병상 절규
기사입력 2000년 04월 06일 15시 00분
혼수상태의 환자가 알듯말듯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자세히 들어보니 "봉주는 시드니올림픽을 위해선 더이상 뛰면 안된다"는 얘기였다.
그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국 마라톤을 호령하던 정봉수감독(66)이었다.
정감독은 수년째 앓아오던 만성신부전증이 악화된 데다 투석치료중 세균에 감염돼 지난달 30일 이 병원에 입원했다.
항생제를 맞느라 간기능이 급격히 약화되어 이따금씩 의식을 잃곤 한다는 게 담당의사인 박정식 박사(신장내과)의 얘기다.
박박사는 환자의 육체적인 쇠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극심한 허탈감으로 인한 자신감 결여가 치료의 최대장애라고 덧붙였다.
정봉수 감독은 92년부터 지난해까지만해도 세계 마라톤계에서 가장 잘나가던 지도자중 한사람이었다.
그의 카리스마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결국 이런 그의 성격이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과 은메달을 조련했다.
그토록 표독스럽던 지도자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소위 세계마라톤계를 호령하던 `정봉수 사단'의 와해가 그 이유다.
김이용의 막무가내식 입대, 이봉주의 숙소이탈, 선수단 집단 사표 등 일련의 사태는 한평생을 마라톤에 바쳐온 그에게 더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게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감독은 의식이 혼미한 가운데도 "이봉주의 올림픽 입상을 위해선 더이상 경기에 출전시켜서는 안된다"며 절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봉주는 지난 2월 도쿄마라톤대회서 2시간7분20초로 한국 최고기록을 수립하며 올림픽 출전티켓을 따낸 뒤 3월19일엔 동아마라톤을 뛰었고, 9일에는 전주-군산 마라톤대회에 출전할 예정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이봉주의 잇따른 대회 출전.
육상계 모두가 이 환자의 외침을 한번쯤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의진 기자 ej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