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카사노바] 가짜 검사 (1)

기사입력 2000년 03월 29일 18시 23분


20대 남자가 다가서자 "어서 오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미소를 지으며 맞았다. 미소는 틀에 박힌 것처럼 보였고 이 남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다소 사무적인 냄새가 풍기기도 했다.

"네, 예금통장 하나 개설하려고 왔습니다."

여행원은 서류를 건네주면서 "여기에 적으세요"하고는 다른 일을 보았다. 20대 남자는 서류의 빈칸에 '김인석 25세. 서울 관악구 봉천동…' 이름과 주소 등을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그러다 직업란이 나오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비워둔 채 여행원에게 제출했다. 이미영은 서류를 훑어보더니 "직업란도 쓰세요" 했다.

"학생인데요"

"그럼 학교와 학과를 쓰세요"

김인석은 서류를 돌려 받아 이미영이 보는데서 'S대 법학과'라고 적었다. 이를 본 이미영은 김인석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복장은 남루하지만 콧날이 오똑하고 눈빛이 날카로운게 영락없이 수재형이었다. 이미영은 금새 태도를 돌변, 친절해졌다. 상냥하고 싹싹하게 불필요한 설명까지 해주며 통장을 개설해줬다.

김인석은 참으로 신기했다. S대 법학과의 위력이 그토록 대단한 줄은 전혀 생각치 못했기 때문이다. 김인석은 뚜렷한 직업이 없어 직업란에 뭐라고 쓸까 고민하다 얼떨결에 학생이라고 대답했고 장남삼아 S대 법학과라고 적은 것이다.

통장을 받아든 김인석은 장난을 한번 더 쳐보기로 했다. '오후 6시반, 건너편 카페로 나오세요'라고 적은 메모지를 작게 접어 여행원에게 슬며시 밀어주고 나왔다.

김인석은 이미영이 안나옳지도 모르지만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시간에 맞춰 카페로 갔다. 의자에 앉아 미리 준비해간 법률서적을 펼쳐들고 있는데 10분쯤 지나자 이미영이 들어섰다.

김인석은 보던 책을 덮어 탁장 위에 놓고 반감게 맞이했다.

"나와주셨군요. 혹시 안나오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나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하다가 기다리실 것 같아서 나왔어요."

"아뭏든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앉으시지요, 차나 한잔합시다."

"사실 저 이런자리 나오는 사람 아니거든요. 이상한 여자로 보지 말아주세요"

이미영은 몹시 부끄러운 듯 고갤르 숙인 채 몸을 비비꼬며 변명하려 들었다.

"저도 사실 아무한테나 만나자고 하는 사람 아닙니다. 너무 친절하게 해주셔서 그냥 차 한잔 대접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래서 둘은 커피잔을 마주 놓고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됐다.

"저 지금 몇학년이세요?"

이미영의 질문에 김인석은 잠시 생각했다. S대 법학과라는 말에 이런 미인이 자석처럼 끌려오다니, 내친김에 자력을 좀 더 높이기로 맘먹었다.

"실은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제 곧 사법 연수원에 들어가게 돼요. 그래서 아까 직업란을 비워뒀던 건데 쓰라고 하셔서 모교를 적은 것입니다."

"어머 그럼 사법고시에 합격하셨어요?"

"네."

"축하해요 그럼 법관이 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저는 검사가 될겁니다. 그래서 이땅의 범죄를 소탕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구해줄 겁니다."

이미영은 대어를 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카페에 나왔는데 알고 보니 월척 중의 월척이라니. 가슴이 '꽁딱꽁딱' 뛰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