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윤호진의 연극세상 '정통연극 대접받는 풍토 조성'
기사입력 2000년 03월 19일 15시 51분
내가 70년대에 실험극장에서 연극을 시작할 당시 배우를 했었다는 사실을 얘기하면 아마 놀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한두 작품하고는 그만두었지만 나도 한때는 배우가 꿈인 시절이 있었다. 무대위에서 얼굴에 분칠을 하고 조명 빛을 받으며 울고, 웃고 하는 그 일은 확실히 묘한 매력이 있다. 물론 여러가지 여건이 배우보다는 연출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배우 일에서 손을 놓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100번 잘한 일이다) 공연예술의 꽃은 역시 무대에 서는 배우들이다.
연출이 연습 때 아무리 지시를 해도 공연 때 무대위에 서면 결국 그것은 배우의 몫이다. 연출로서 난 아무 것도 지시할 수 없다. 일단 공연이 시작되면 그것은 무대에서는 배우들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자기역할에 몰입하여 무대위 인생을 즐기는 배우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큰 복을 타고 난 사람들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연기란 독특한 재능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연극과 학생들의 수업시간에서도 보면, 재능은 좀 떨어지지만 노력으로 극복하는 배우의 유형이 있고, 학교생활에 결코 성실치 못하다고 판단되지만 연기 수업시간에 빛을 발하는 유형도 종종 있다.
물론 그 학생에게는 자기 자신의 그릇을 위해 더욱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안에 내재된 에너지를 통해 거칠게 튀어나오는 그 연기는 분명 타고난 재능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연출자들은 이런 배우들을 만났을 때 흥이 난다. 작품을 진정한 완성품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물론 뮤지컬처럼 무대 기술적인 측면이 배우의 연기만큼 비대해진 장르가 점차 세계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고, 급변하는 오늘날의 사회변화에 맞지 않아 캄캄하고 어두운 극장이 건조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듯도 하지만, 정통연극은 진정한 배우를 만드는 발전소와도 같다.
세계적인 뮤지컬 보유국인 런던이 끊임없는 걸작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그 연극적 기초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뉴욕의 경우도 실험극으로 유명한 BAM 이라는 극장이 있는데, 브루클린의 이 극장과 연극조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물론 끊임없는 투자와 노력으로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이 극장의 공연행위들은 기성 연극인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고있으며, 진정 끼있는 좋은 신인배우들이 많이 탄생되는 등용문과도 같다.
나도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볼라치면 어디 좋은 신인배우들이 없나 살피게 된다. 물론 요즘에는 뮤지컬 제작에 온 힘을 쏟고있기 때문에 춤과 노래가 함께 가능한 배우들을 눈여겨보곤 하지만, 막상 찾기가 쉽지 않다.
외국의 경우, 연기자 협회가 있어 모든 배우들, 즉, TV, 영화, 연극계를 통틀어 모든 배우들을 한꺼번에 등급제로 관리한다. 그리고 이들의 유니온이 조직되어 있어서 배우들이 장르를 넘나드는 일도 수월하고, 자신들의 권익을 충분히 보장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사회적인 여러 가지 여건이 다르겠지만, 통합 연기자 협회 같은 것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또한, 적극적인 지원과 필요성을 인지하고 좋은 연기자들이 자신의 기초적 역량을 키워 진정 훌륭한 엔터테이너가 될 수 있는 장을 자꾸 조성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땀이 무대에서 가깝게 느껴지는 그런 연극들 말이다.
내 인생의 후반 기획 중에 하나도 다시 정통연극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영국처럼 정통연극이 대접받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올봄 대학로에 끼가 넘쳐 흐르는 신명나는 배우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극연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