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4)
기사입력 2000년 03월 07일 14시 43분
그날밤, 지난번처럼 이화원의 동궁문 앞에서 장용수를 만난 이대진은 그와 함께 승용차에 올랐다. 차에는 최씨와 운전사가 앉아 있었는데 차가 출발했을 때 장용수가 말했다.
"이선생, 이 안경을 써 주셔야겠소. 이해하시오."
그가 건네준 선글라스를 끼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경알에 검정색 테이프를 붙여놓은 것이다.
차는 한시간쯤 달렸는데 차량들의 소음이 뜸한데다가 도로가 굴곡이 심한 길로 들어서더니 속력을 뚝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10분쯤 나아가더니 멈춰섰다.
"자, 내리십시다."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에서 내린 이대진은 차가 어느 사이에 건물의 마당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았다. 앞쪽의 커다란 단층 시멘트 건물 문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올 뿐 주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근처에 주택도 보이지 않아서 마치 외딴 곳에 세워진 감옥같은 분위기였다. 이대진은 장용수를 따라 건물의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넓었고 한쪽 구석에 표식도 없는 자루가 천정에 까지 닿도록 쌓여져 있었는데 바닥은 깨끗했다.
자루 옆쪽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던 두 사내가 이대진을 바라보았다. 카드를 하고 있었는지 나무탁자 위에 카드가 어지럽게 흩어졌고 술병도 놓여졌다.
사내들 옆을 지나 사무실로 보이는 문으로 따라 들어선 이대진은 노인들을 보았다. 사무실 안쪽의 낡은 소파에 둘러 앉아있던 노인들이 일제히 머리를 들었고 그중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왔어. 이 선생이셔!"
김성복 노인이다. 우루루 일어선 노인들이 다가오더니 이대진의 손을 쥐거나 옷자락을 잡았고 어떤 노인 하나는 부동자세로 서더니 흔들리는 팔로 경례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사람도 말을 걸지는 않았다. 이대진은 노인들이 모두 울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늙어 눈물샘이 마른 때문인지 모두 주름살 천지의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들썩였지만 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겨우 이대진이 소파 구석에 앉았을 때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장용수가 말했다.
"그럼 이야기를 나누시라구요. 난 밖에 나가있을 테니까."
이대진은 마치 말 잘듣는 초등학생들처럼 옆에 앉은 노인들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목이 메었지만 차츰 가슴이 답답해 지더니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나서는 무럭무럭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소."
김성복 노인이 먼저 말했다.
"그래서 신상명세와 가족까지 모두 적어놓고 있었소이다."
그러자 눈동자 하나에 백태가 낀 노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오셨다고 했지요?"
놀란 이대진이 힐끗 김성복 노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비밀 지시올시다. 밖으로 새나가면 큰 일납니다."
백태낀 노인이 딸꾹질을 하듯 숨을 들이키며 어깨를 치켜 올렸으므로 이대진은 그가 만세를 부르지나 않을까 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노인은 긴 숨을 뱉으며 가라앉았다.
"국방장관께 보고할 첩보가 있소."
소리를 죽이며 말한 노인은 아까 거수경례를 했던 뼈와 가죽만 남은 노인이었다.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이대진을 보았다.
"회령에 있는 제 38인민군 포병대의 150㎜ 야포는 모두 125문이요. 내가 다 세어보았소."
이대진이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이노인에게 위성사진이 자동차 넘버판까지 식별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줄 필요는 없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