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카사노바] 가짜 재미교포 사업가 (4)

기사입력 2000년 03월 01일 14시 51분


박사장은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남자를 까맣게 잊고 지내왔는데 어쩌다 이토록 방탕하게 됐는지 자신의 변한 모습을 되돌아 본 것이다.

그리고 강회장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봤다.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몸을 섞었고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났고 그뒤 계속 만났고 그러면서 돈을 빌려갔고…. 그뒤 툭하면 돈을 빌려달라고 해 빌려준 돈이 거액으로 불어났고. 뭔가 이상하다는 예감에 이른 것이다.

강회장이라는 사람 어딘지 미심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세련되고 젊잖지만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않은채 요즘들어 돈 빌려달라는 요구만 부쩍 늘어났다.

박사장은 서랍을 열고 강회장의 명함을 꺼내들었다. 거기엔 미국 현지 전화번호가 여러개 나와 있었다. 박사장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어봤다. 결번이다. 나머지 전화번호도 모두 걸어봤지만 결번 아니면 엉뚱한 번호였다.

`속았구나.' 박사장의 머리가 띵해졌다.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데 여비서가 들어와 "강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고 보고했다.

박사장은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저에요."

"아, 박여사. 나요. 오늘 저녁 시간이 어떻소?"

박사장의 수화기를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선듯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 박여사. 어디 아파요. 왜 대답이 없오?"

"아니에요. 나갈께요."

만나야 한다. 그래서 따져야 한다. 약속장소인 모 호텔 커피숍으로 나가자 강회장이 먼저 나와 예의 버릇 대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치켜 들고 "여기요!"하고 외쳤다. 전엔 그렇게 맞아주는 모습이 정겨웠지만 이제는 이무기가 입을 쩍 벌리고 앉아있는 것 처럼 징그럽게만 느껴졌다.

"식사해야지. 뭘 들겠오?"

"아니에요. 그보다 할 얘기가 있어요."

강회장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무슨… 결혼얘기요?"했다.

박사장은 말없이 냉수를 한모금 삼키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강회장님은 뭐하시는 분이에요?"

"얘기했잖소? 미국에서 사업한다고."

"내가 미국으로 전화해봤어요."

강회장은 고개를 떨군채 한숨을 푹 쉬더니 "미안하오. 사업에 실패해 귀국해버린거요. 그러니 전화번호도 모두 바뀌었겠지. 솔직히 말하지 못한 것 사과드리겠오."

"어떻게 그렇게 속일 수가 있어요."

"난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반해버렸오. 당신과 결혼하고 싶었고 그래서 털어놓지 못했던거요."

"이제 우리 헤어져요. 그리고 돈 돌려주세요."

강회장의 표정이 일시에 구겨졌다. 그동안의 인자했던 표정은 간데 없이 사라지고 악마의 흉상처럼 변했다.

"그건 안 되지. 돈도 없구. 나 오늘도 박여사에게 돈좀 빌리려고 했는데…."

"우린 끝났어요. 돈 돌려주세요."

강회장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이거 왜 이래. 지금까지 실컷 데리고 놀고 이제 싫증 나니까 차 버리겠다는거야, 뭐야!"

박사장은 어이가 없었다.

"강회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몹쓸 분이군요."

"그래, 나 그런 놈이다. 이제 알았어."

"저 가겠어요.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박사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강회장은 "이봐! 이봐!"하면서 따라나섰으나 못 들은체 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에 막 오르려는데 뒤에서 강회장이 박사장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이년, 뒈질려고 환장했나."

"이거 놔!" 박사장의 앙칼진 소리가 터져나왔다.

강회장은 박사장의 따귀를 갈렸고 박사장도 강회장의 얼굴을 할퀴며 반항했다. 박사장의 몸에 강회장의 주먹과 발길이 수없이 날아들었고 박사장은 얼굴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함부로 까불면 네년 회사와 집에 모두 알릴거야. 얌전히 굴어."

강회장은 쓰러진 박사장을 내려다 보며 엄포를 남기고 돌아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