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투쟁 (27)
기사입력 2000년 02월 25일 14시 11분
저녁 7시 정각이 되었을 때 이대진은 다시 이화원의 동궁앞에 섰다. 오후 5시면 이화원은 폐방이 되는 터라 동궁앞 뜰은 한산했다. 어둠이 덮이기 시작한 주위를 둘러보던 이대진은 계단에 앉았다.
미국은 6．25전쟁이 끝난지 50년이 되었어도 6．25때 북한땅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라도 찾으려고 북한과 끊임없이 접촉을 했고 지금도 판문점을 통해 가끔씩 유해가 반입되어 온다.
또한 적지에 추락한 조종사 한 명을 구해내려고 대서양 함대와 수천명의 해병이 압박해 가면서 대통령이 구출 작전을 직접 지휘하는 나라인 것이다.
그러니 미국 국민들의 자긍심이 높지 않을리가 없다. 이것이 곧 군의 사기로도 직결될 것이며 타국으로부터 무시를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담배를 피워문 이대진은 어둠 속으로 길게 연기를 뿜었다.
북한에 6．25 때의 한국군 포로가 아직도 남아 강제 노역을 하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가끔씩 나왔고 실제로 작년에는 국군포로 한명이 탈출해나와 국방장관 앞에서 눈물의 신고를 하는 것도 TV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언론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으며 당과 자신과의 이해가 적은 정치권은 그냥 몇번 떠들다가 말았다. 이러니 한국 국민들이 무시받지 않을리가 없다.
유엔 난민기구에서 난민으로 규정한 탈북자들마저도 마치 부랑민처럼 러시아와 중국에서 모두 추방되어 돌아가면 죽는 땅으로 다시 보내졌다. 그러나 정치권은 오직 힘없고 무기력한 외교부만 질타했을 뿐이다.
옆쪽에서 인기척이 났으므로 이대진은 머리를 돌렸다. 어둠속에서 두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깝게 다가선 그들은 장용수와 비슷한 나이의 한 사내였다.
"자, 갑시다."
장용수가 옆쪽 사내는 인사도 시켜주지 않고 몸을 돌렸으므로 이대진은 일어나 뒤를 따랐다.
"혼자 오셨소?"
서둘러 담장길을 걸으면서 장용수가 물었다.
"그 아가씨는 성깔이 대단합니다."
"지금 연락을 기다리고 있지요."
이대진이 힐끗 옆에 붙어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선생도 조선족이십니까?"
"그렇소."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사내가 당황한듯 눈을 크게 떴고 앞서가던 장용수가 걸음을 늦췄다.
"기분 나쁜일 없소."
"최씨는 성격이 뚝뚝해서 말입니다."
장용수가 거들었다.
"가끔 오해를 받지요."
그러자 정색한 이대진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설명 안하셨다면 꼭 납치해가는 분위기가 될 뻔 했습니다."
"그런가요?"
이제는 장용수도 당황한 듯 어둠속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이선생은 농담도 잘 하십니다."
다시 걸음을 뗀 그들은 옆쪽의 대로로 나왔다. 길가에 선 장용수가 이대진을 바라보았다.
"차를 타고 30분쯤 가면 됩니다. 그곳에서 다섯명 노인들을 만나실 수 있지요."
"그럼 이곳으로 모시고 오시지오."
부드럽게 말한 이대진이 턱으로 최씨라는 사내를 가리켰다.
"난 최선생하고 이근처 반점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아니 다섯명을 모두 말씀이오?"
눈을 크게뜬 장용수가 거칠게 되물었고 최씨라는 사내는 몸을 굳혔다. 머리를 끄덕인 이대진이 사파리 주머니에 두 손을 넣었다.
"한분만 모시고 와도 됩니다. 확인하고 싶으니까요. 당신들의 집으로 갈 생각은 없습니다."
이대진이 다시 턱으로 최씨를 가리켰다.
"어떻습니까? 최선생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