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하일성의 야구세상 '지방중계후 기차 상경 추억담'
기사입력 2000년 02월 17일 15시 02분
지방구장에서 낮경기가 있을 때는 별문제가 없으나 야간경기가 있는 날이면 밤늦은 귀경길이 문제가 되는 날이 많다. 한번은 대전경기 중계해설을 마치고 이장호 아나운서와 서울역에 도착해보니 새벽 1시쯤이 됐다. 같이 방송을 오래하다 보면 얼굴만 보아도 무슨말을 할지 알수 있듯이 우리 둘은 동시에 "한잔 꺽으면서 밤을 새우자"는 말이 나왔다.
그 시간에 이 아나운서나 나나 집에 들어가야 곤히 자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피해만 준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옛 시경뒤에 어묵을 맛있게 하는 단골술집을 알고 있는 터라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아나운서와 이런저런 이야기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어디선가에서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하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노래가사처럼 어느새 새아침이 밝아 있었다. 우리는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다.
집에 들어가자니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마나님께 동네 이발관에 들려 집에 들어가겠다고 보고를 하고 이발관에서 잠을 청해 자고 있는데 그때 마나님이 숨가쁘게 달려 오더니 내일 대구 방송해설이 오늘로 앞당겨졌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부랴부랴 서울역으로 달려가서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 중계방송 준비에 들어갔다.
밤새도록 나를 찾았을 PD와 스태프들이 `안도 반, 미움 반'의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내 잘못인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중계방송이 시작되자 `제발 하품이나, 졸지말라'고 담당 PD가 연신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중계방송을 마치고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이장호 아나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아나운서님, 지금 대구에 와 있습니다." "아니 대구에는 왜 가있어?"
그때까지도 술이 덜 깬건지 하품하는 소리로 말하는 그에게 말문이 막혔다. "으이구…." 아무튼 그날 이후 방송이 잡힌 전날에는 누가 꼬셔도(?) 술은 안먹는다는 철칙이 생겼다.
또 지방경기 중계때에는 여러가지 교통편을 이용하게 되는데 신경을 안쓰고 편안하게 탈 수 있는 것이 기차다. 안전성 뿐만아니라 침대칸이 있어서 휴식을 취하기도 좋다. 더구나 한잔할 수 있는 간이식당이 있으니 나로서는 그저 철도청에 감사한 마음 뿐이다.
언젠가 지방 중계방송을 마치고 기차를 타게 됐다. 그날은 고 허 규씨(전 SBS체육부장)와 김재길씨(당시 KBS중계부장) 그리고 내가 한패(?)가 되어 기차안에 자리를 잡게 됐다.
두분과 가볍게 한잔을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고 심심하기만 했다. 그래서 `뭐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하는 궁리 끝에 허 규씨와 김재길 선배를 놀려주자는데 합의했다. 나와 허 규씨는 마침 지나가는 역무원을 불렀다.
"수상한 사람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닙니다."
우리는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손가락으로 김재길 선배를 가르켰다. 별명이 `까까'(짧은 스포츠머리 때문에)인 김 선배를 보는 역무원의 눈이 거짓말 조금 보태서 간첩 잡는 대공수사요원처럼 비장함에 번뜩번뜩 거렸다. 열차를 내려서 안 사실이지만 그 역무원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고,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동행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김 선배에게 몇날 며칠을 화풀이에 시달렸지만 무척 즐거운 추억의 하나로 남아있다. 지금도 중계를 마치고 기차를 타는 일이 있으면 김 선배와 그 역무원이 생각나서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실실 웃곤 한다.
[야구 해설가 hisbase＠chollian.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