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폴라리스 랩소디 (46)
기사입력 1999년 04월 25일 15시 17분
질풍호의 선장 트로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처음 왼쪽 눈을 잃고 안대를 착용했을 때 허전해서 만지곤 하던 것이 그만 버릇이 된 것이다. 트로포스는 배 앞의 해원 가득히 깔린 안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드래곤 한 마리가 숨어 있어도 흔적도 없겠는 걸."
그의 등 뒤에 있던 질풍호의 해적들은 소름끼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노스윈드의 선단을 가로막고 있는 미노만의 안개는 농밀한 정도를 넘어서 차라리 하얀 산처럼 보였다.
그래서 척후선의 역할을 맡은 질풍호는 미노만 입구에서 어영부영하다가 후발대에 따라잡히는, 꽤나 창피스러운 지경에 빠져있었다. 트로포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질풍호의 뒤쪽으로는 노스윈드의 선단을 구성하는 나머지 일곱 척이 미노만의 입구를 가득 메운 채 정렬해 있었다. 흑기사호의 검은 선체를 보던 트로포스는 문득 오른쪽 눈을 꿈틀거렸다. 그는 주위의 선원들에게 말했다.
"이봐, 저기 흑기사호 좀 봐주게. 무슨 연기 같은 것이 보이는데?"
"예. 오닉스 선장님께서 부적을 태우고 있습니다."
"…논다, 놀아."
트로포스는 혀를 차고는 다시 다른 배로 시선을 옮겼다. 흑기사호 왼쪽에 있는 페가서스호의 이물에는 하리야 선장이 그 특유의 찌푸린 얼굴을 더욱 찌푸린 채 서 있었다. 그랜드머더호에서는 킬리 선장이, 그랜드파더호에서는 돌탄 선장이 각자 이물에 서서 트로포스의 머리 너머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스윈드의 전투함들이 그 뱃머리에 각자의 위대한 선장들을 세우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부적을 태우고 있는 오닉스의 모습 때문에 풍경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전투함들의 한가운데에는 자유호와 레보스호가 떠있었다. 자유호에는 항상 그렇듯이 키 드레이번 대신 식스가 근엄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었고, 레보스호의 임시 선장 라이온은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트로포스는 식스의 모습에 주목했다.
잠시 후, 식스의 입이 뭐라고 움직였다. 자유호의 기수는 재빨리 기를 흔들었고 트로포스는 그 깃발신호에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전진 명령이 나온 것이다.
"제기랄！ 이 안개 속으로 들어가라니."
미노만은 정규항로가 아니기 때문에 트로포스호에는 미노만의 물길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암초나 곶이 어디서 튀어나올 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지독한 안개 속에선 미리 발견하기도 힘들다. 자칫하면 해안 절벽에 배를 박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선원들은 불안한 얼굴로 트로포스를 바라보았다.
"어떡하죠?"
트로포스는 찡그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선원들을 돌아보았다.
"할 수 없군. 죽는 것이 싫냐, 마법이 싫냐."
"마법이 싫습니다"라는 대답이 이구동성으로 터져나왔고, 그래서 트로포스는 히죽 웃었다. 질풍호의 선원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의 선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트로포스가 입을 열었을 때 선원들의 표정은 공포로 바뀌었다.
"그런데 난 죽는 것이 더 싫어. 내 지팡이를 가져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