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플라리스 랩소디(4)
기사입력 1999년 03월 04일 15시 02분
라스 법무대신은 팔짱을 끼며 시선을 테이블로 떨구었다.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는 남자에게만 들립니다. 그래서 그 꽃의 다른 이름은 템프테이셔너입니다."
"네?"
율리아나 왕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라스 법무대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하지만 제게는 들렸어요. 이런 노래였어요."
그리고 눈을 감고 허밍을 시작했다. 낮고 부드러운 허밍이었다. 늙은 법무대신은 참으로 오랜만에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는 전율을 느꼈다. 왕녀가 부르는 허밍은 깊은 밤 특별 화물실에서 새어나오는 싱잉 플로라의 낮은 노랫소리와 똑같았다.
익숙하지 못한 배의 침대에 누워 뒤척일 때마다 귓가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는 법무대신에게 애잔한 슬픔과 에로틱한 환상을 불러 일으켰다.
대륙 9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도스 계곡에서만 자라는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가 법무대신의 늙은 몸에 일으키는 반응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마법사 하이낙스는 평생 동안 어떤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고 오로지 백금 화분에 심은 싱잉 플로라만을 사랑했다고 한다. 라스는 이제 그 전설을 믿을 수 있었다.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에 법무대신은 자신의 주책없음에 어쩔 줄 몰라 해야 했다. 어린 신부에게 권할만한 노래가 아니었다. 그런데 율리아나 왕녀 역시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단 말인가?
"아, 예. 알겠습니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그런 허밍은 천한 광대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예? 하지만 예쁘고 슬픈 노래였어요. 천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걸요."
"그렇더라도 일국의 왕녀께서 허밍 같은 것에 관심을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성스러운 결혼식을 앞둔 신부라면 몸가짐이 좀 더 단정해야 할 겝니다."
"네…."
율리아나 왕녀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허밍은 중단했다. 그리고 다시 아까의 화제를 들먹였다.
"어쨌든, 그렇게 비싼 꽃까지 실려있다는 것은 제 주장의 좋은 증거가 될 거에요. 저는 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책은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율리아나 왕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명석한 율리아나 왕녀는 곧 라스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었다.
"법무대신님！ 저는 책을 좋아하는 것이지, 책갈피에 꽃을 끼우기 위해 책을 들고다니는 것은 아니에요."
"하하. 농담이었습니다."
라스는 웃으며 사과했다. 율리아나 왕녀는 턱을 조금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리며 말했다.
"그리고 발도 로네스 기사단장이 꽃을 좋아한다는 말도 듣지 못했어요. 그 꽃을 실은 것은 그것이 비싸기 때문이겠죠. 저는 뇌물에 혼수품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따라가는 거라구요."
"왕녀님. 정말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왕녀님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율리아나 왕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훗！ 손꼽히는 미인이라구요? 제가 왕녀가 아니라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필마온 기사단 따위의 해적 녀석들에게는 너무도 아까운 미인이십니다."
율리아나 왕녀는 삼촌인 법무대신에게 이토록 원색적인 칭찬을 듣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말았다. 잠시 대화는 숨막히는 정적에게 자리를 내줬고, 두 사람은 찻잔을 테이블에 올렸다 내려놓았다 하는 일에 열중했다. 한참 후 율리아나 왕녀는 다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라스님? 제가 방금 무슨 생각하셨는지 아세요?"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율리아나 왕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키 드레이번이라면 이런 배는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을 거에요."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