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50년만에 시어로 터진 제주4·3항쟁
기사입력 1998년 04월 12일 15시 53분
봄 시단에 시가 풍년이다. 4월의 시집에는 먼저 민족사의 비극 제주 4．3항쟁을 소재로 한 시편들이 눈에 띈다.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바람처럼 까마귀처럼'은 4．3항쟁 50주년 기념시선집이다. 선집은 문충성 등 4．3을 원죄로 삼고 살아가는 제주출신 시인 16명의 66편 시들을 한데 모아놓고 있다.
푸른숲이 내놓은 홍성운의 `숨은 꽃을 찾아서' 역시 4．3항쟁 등 제주역사에 서린 한과 설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동굴의 꿈' 등 시인이 부르는 노래 속에는 설움 속에서 더욱 절박해지는 생존의지와 자존의식, 삶에 대한 곡진한 애정이 담겨있다.
문학과지성사가 한꺼번에 내놓은 4권의 시집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이기철의 `유리의 나날'은 금욕적 삶을 통해 순결하고 맑은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구도적인 역정을 노래한다. 이상향을 상징하는 유리는 투명하여 그림자를 거느리지도, 불투명한 무거운 덩어리로 시야를 가리지도 않는다. 그것은 다만 가볍고 육체성이 없는 욕망이 깃들이지 않은 태초의 순수한 형태나 장소이다.
성기완의 `쇼핑갔다 오십니까?'는 불온한 욕망으로 가득차있는 소년과 같다. 자신의 위상을 사회질서 안에 위치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년이다.
신중신의 `카프카의 집'은 시인의 명징한 시선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시인의 눈은 주변의 하찮은 것들을 발굴하여 독자앞에 반짝이는 보석으로 만들어 보여준다.
주창윤의 `옷걸이에 걸린 양(羊)'은 현대문명의 이면에 숨겨진 허구과 허점을 보여준다. 시인의 눈은 전복적이며 때로 익살스럽다. 그러나 핵심을 뚫는 시선은 놀랍다.
문학동네가 내놓은 정일근과 박이도의 시집들도 눈에 띈다.
정일근의 `경주남산'은 이끼낀 푸른 돌 속에 그려져있는 신라 천년의 모습을 아련히 보여준다. 그의 시는 사색의 깊이와 서정의 힘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박이도의 `회상의 숲'에 실린 시편들은 양심을 지키기 위한 긴장의 산물이다. 시인은 고통을 말할 때도 직접화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대신 관념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양심이라는 문제를 거론한다.
[이승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