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백건우 '라벨 피아노전곡 독주회'
기사입력 1998년 03월 27일 16시 36분
불꽃이 잦아들고, 완전히 타고 남은 재처럼, 연주자의 얼굴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혼을 쏟아부었기 때문. 그는 피아노에 기대 기운을 추스른 후 천천히 이마의 땀을 닦았다. 잠시 태풍전야같은 정적이 감돌았고, 이어 박수갈채가 우레처럼 쏟아졌다.
지난 25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의 `라벨 전곡 연주회'. 혼신의 연주, 관객들의 뜨거운 기립박수가 IMF시름을 까맣게 잊게 해준 공연이었다.
2천600석을 가득 메운 객석도 사상 최악의 불황을 무색하게 했다. 부닌 독주회에 이은 올해 두번째 매진사례. 좋은 공연에는 역시 관객이 밀려들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이날 공연은 독주회로는 이례적으로 3시간 가까이 진행, 오후 10시 30분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러나 관객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
"마치 꿈속에서 꽃밭을 거닐다가 온 것 같다" "두려움마저 느낀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는 반응들. 연주회 내내 악보를 뒤적이며 듣던 한 여고생은 "나는 언제 저렇게 칠 수 있을 지, 그런 날이 오기나 할 지 모르겠다. 감히 존경한다는 말도 못하겠다"고 감동을 표현했다.
라벨의 피아노독주곡은 모두 13곡. 환상적이고 색채감이 풍부하면서도 고전에 바탕을 두어 구성이 탄탄하다. 극한의 기교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물의 유희' `쿠프랭의 무덤' `밤의 가스파르' `소나티네' `거울' 등이 걸작으로 꼽힌다.
백씨와 라벨은 인연이 깊다. 지난 72년 첫 전곡 연주로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작품이다. 국내에서의 전곡 연주는 이번이 처음. 지난 14일엔 파리에서도 공연을 가져 큰 호응을 얻었다.
피아니스트 박은희씨는 공연이 끝난 후 "음반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예민하고 세밀하다. 1부에선 몰아치는 힘이 돋보였고 2부는 피아니시모, 3부는 팽팽한 긴장감과 정적이 조화된 연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작품 구성이 드라마처럼 완벽했다"면서 "그는 역시 거대한 피아니스트"라고 평가했다.
[임정식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