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 실종(22)

기사입력 1998년 03월 26일 15시 13분


카이로에 도착한 것은 아침 일곱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시 외곽에서 수에즈부터 타고온 택시를 보낸 다음 그들은 두번이나 택시를 갈아타고 에드나르브 알아흐마르 지구에서 내렸다.

모스크가 즐비한 이슬람지구여서 아침 거리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전통의상 차림이었고 일찍 나온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요시에는 지리에 익숙한듯 앞장을 섰다. 골목을 돌아 삼십분쯤 헤맨 다음에 그녀가 멈춰선 곳은 알무이즈 거리의 혼잡한 시장 앞이었다.

"저기, 모스크 옆의 시계가게가 하무드의 은신처예요."

요시에가 고기가게의 처마 밑에 서서 눈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가게 주인은 핫산인데 하무드의 친구라고 했어요."

"내가 가보겠소."

이준석이 메고 있던 배낭을 요시에에게 건네주었다.

"이쪽으로 데려올테니 기다려요."

"어떻게 데려온다는 거죠?"

배낭을 받아쥔 요시에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무드가 어떻게 생겼는지나 아세요?"

"마른 체격에 콧날이 휘어졌다고 들었소."

"저사람도 그렇지 않아요?"

요시에가 턱으로 앞을 지나는 이집트인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사람도."

"그럼 당신은 얼굴을 안단 말이오?"

눈썹을 치켜세운 이준석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비꼬는것 같이 들린 것이다.

그러자 요시에는 재킷 주머니에서 명함 크기의 사진 한장을 꺼내 내밀었다.

"오른쪽이 하무드예요. 왼쪽은 죽은 파이즈이고."

"…."

"파이즈가 죽기전에 천불을 주고 받았어요."

"당신은 돈이 무기로군."

"할 수 없지요. 효과가 있기도 하고."

요시에가 바지 주머니에서 고무줄로 둥글게 묶은 지폐뭉치를 꺼내더니 이준석의 저고리 주머니에 넣었다.

"5천불예요. 하무드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주세요. 아마 효과가 있을테니까."

시계가게 안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유리판을 닦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는 이준석을 향해 누런 이를 보이며 웃었다. 마수거리 손님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

다가간 이준석은 유리판을 사이에 두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한국인이오."

"압니다. 난 한국인 친구가 많지요. 미스터 김, 미스터 리."

한숨을 내쉰 이준석이 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 들었다. 요시에가 준 돈이다.

"이건 5천불이오. 당신 친구 하무드에게 주려고 가져왔어."

그 순간 사내의 얼굴이 신전의 석상처럼 굳어졌다. 눈알도 돌아가지 않았고 가게 안에는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사내가 입을 떼었다.

"하무드가 누군지 모르지만 도대체 왜 찾는거요?"

"버스 폭발때 내 약혼자가 실종되었소. 당신도 신문을 보았을거요."

"약혼자를 찾으려고 왔단 말이오?"

"그렇소."

"하무드가 여기 있다는건 어떻게 알았소?"

"룩소르에서 하무드의 친구였던 파이즈가 말해 주었소."

그러자 다시 이준석을 쏘아보던 사내가 힐끔 손에 쥔 돈뭉치를 바라보았다.

"내 몫은 얼마요?"

그러자 이준석은 길게 숨을 뱉었다.

"천불을 주겠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