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석] 스포츠 정신 실종된 '펜싱'
기사입력 1998년 03월 17일 14시 42분
70년대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프로레슬링이었다.
온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개미처럼 일만 하던 시절, 저녁마다 TV앞에 모여앉아 프로레슬링 중계를 보며 울고 웃는게 서민들에게는 커다란 낙이었다.
그런 프로레슬링이 어느날 갑자기 우리 앞에서 싹 사라졌다.
이유는 딱 하나.
승자와 패자를 미리 정해놓고 각본에 따라 치고 받는 `쇼'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팬들이 아찔한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당한 경쟁에 따른 `결과의 불예측성'이 스포츠의 가장 큰 매력임을 감안하면 팬들이 눈을 돌린건 너무도 당연했다.
제27회 회장배전국종별펜싱선수권대회가 벌어진 16일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생긴 해프닝은 70년대 프로레슬링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날 남자 일반부 사브르 결승전의 맞상대는 동양시멘트 소속의 `한솥밥 식구'인 이수근과 이현수.
둘은 남고부 에페 결승전이 끝나는대로 맞붙어 최후의 승자를 가리게 돼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게임을 눈앞에 둔 선수들이 경기복을 벗더니 주섬주섬 짐을 꾸려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어차피 같은 팀 선수니 겨뤄볼 것 없이 우승자를 팀 내부적으로 결정하겠다"는 동양시멘트측의 제의를 협회가 받아들여 결승전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기자의 항의에 펜싱협회 사무국장이 황급히 밖으로 나간지 5분후.
"사브르 결승전이 있겠으니 선수들은 대기해 달라"는 장내방송이 나왔고 다시 장비를 챙겨입은 두선수는 결국 결승전을 치러 15대10으로 이수근이 승리했다.
"평소 실력으로 봐서 결과가 뻔하기 때문에 결승전을 갖지 말자고 했다"는게 패자인 이현수의 말.
이런 제안을 한 선수나 이를 받아들여 결승전을 없애려 했던 협회나 어처구니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날도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 관중석은 일반 관중이 거의 없이 관계자와 선수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기사도'에 뿌리를 뒀다는 펜싱.
비인기 종목이라는 자탄 이전에 생각해야 할 것은 스포츠의 기본정신이 아닐까.
[박진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