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청춘일기] 신은경(3)
기사입력 1998년 02월 22일 15시 50분
일신여중 2학년 때.
난 친구들과 방송국에 자주 놀러가곤 했다. 아역탤런트로 활동하는 남동생 친구 덕분에 방송국 출입이 가능했던 것.
방송국 세트를 구경하면서 내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환상에 젖어들곤 했다. "예쁘게 생겼다"는 방송국 PD의 말도 나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나는 방송국 PD의 추천으로 부모님 몰래 여의도에 있는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집에는 독서실비를 내야한다며 돈을 타서 학원비를 조달했다.
연기학원을 2개월 쯤 다녔을 때. 더이상 부모님 몰래 연기학원을 다니기가 힘들다는 생각에 학원을 그만두려고 마음 먹고 있을 때였다.
캐스팅의 행운이 바로 그때 찾아왔다. 원래는 내가 아니라 학원친구가 캐스팅 물망에 올라 드라마 PD가 학원에 왔었다.
비가 왔던 날로 기억되는데 나는 친구와 같이 집에 가려고 밖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방송국 PD와 잠깐 눈이 스쳤는데 그것이 바로 캐스팅의 계기가 됐다.
다음날 나는 방송국으로 들어가 연출자와 미팅을 가졌고, 그 분은 "키가 너무 커 마음에 걸린다"면서도 나를 캐스팅했다.
지금은 KBS 드라마 제작국장인 최상식 PD가 연출했던 `욕망의 문'이 나의 데뷔작. 나는 여주인공의 아역으로 출연하게 됐다.
내가 나오는 장면은 하나. 남자 아역 연기자와 함께 학교에서 상장을 받는 신이었다. 내가 키가 컸기 때문에 남자 아이가 받침대에 올라 서서 촬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 문제는 드라마 방영이 된 후 `가족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란 점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혼쭐이 날 게 뻔했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부모님이 모두 `욕망의 문'이 방송되는 KBS에 채널을 맞춘 것.
내가 출연한 문제의 장면이 나갈 때엔 정말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는데 아버지는 `설마 내딸이 출연했을까'란 생각을 하셨는 지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나는 드라마가 끝나고 어머니로부터 "좋게 말할 때 그만 둬"란 반협박성 경고를 들어야 했다.
더 큰 사건은 2회 방영에서 터졌다. 내가 직접 출연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내사진을 카메라가 꽤 길게 잡고 있어 누가 봐도 브라운관 속의 나를 알아볼 수 있게 된것.
TV를 보던 아버지는 갑자기 내 얼굴을 휙 돌아보면서 "어디서 많이 본사람이구나"라고 말하셨다.
그 자리에서 나는 무려 3시간 동안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았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꾸중을 들었고, 아버지는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고, 여자는 때되면 시집가면 된다"는 훈계로 끝을 맺었다.
그렇게 혼나고도 나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연기가 재미 있었고, 용돈을 버는 재미도 만만치 않았다.
거의 단역이었지만 회사 경리사원, 시대물의 하인 등 안해본 역할이 없었다.
그때 나의 가장 큰 소망은 빨리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연출자들로부터 "키는 어른인데 얼굴은 아기다"란 말을 종종 들었다. 비중있는 역을 맡는 데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릴 때엔 `나는 하늘을 날 수 있다'란 황당한 생각을 믿을 때가 있듯이 그당시 나는 `신은경은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꼭 멋있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란 굳건한 믿음속에 단역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X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