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공화국] 소산의 몰락(2)
기사입력 1997년 05월 26일 13시 47분
`김현철에 대한 비리'는 양파껍질 같았다.
벗기면 껍질이고 또 벗기면 역시 껍질이다. 알맹이가 나와야 하는데 야당으로서는 도무지 이권 개입이나 국정 개입의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정보가 입력 되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오히려 국회의원들이 고소를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까지 몰렸다.
허원행은 몇번이나 테이프를 공개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차영일의 회사를 비싸게 팔아 준 대가도 있고, 또 `비젼21'과 미사회 조직의 도덕적 타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야당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국정 개입 증거를 꺼내 놓기만 하면 이건 `도깨비 보따리'가 될 수 있지만 이걸 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제길, 이 보따리를 풀면 진짜 특종인데…. 하지만 그들이 나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그들에게 총구를 내밀지 못해."
장국장은 권총을 들고 있고 허원행은 몸에 다이나마이트를 친친 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누군가 죽어 주면 좋겠지만 구조상 `함께 공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특종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김영삼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알게 된 닥터 박경식이 자신의 병원에서 찍은 테이프를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고위관리직은 물론,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에게 여기저기 전화하는 내용이 병원용 폐쇄회로에 잡혔고 이 테이프를 보관한 박경식이 이를 공개한 것이다.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 마침내 동굴 깊숙이 숨어 있던 비리의 공룡 꼬리가 잡힌 것이다.
안기부 차장으로 김현철의 측근 중 측근이었던 김기섭을 즉각 해임했고, 주변 인물들에게 근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언론은 낮잠만 자고 있지 않았다. 그동안 설(設)로만 무성하던 비리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미 포착되었던 사실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김현철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취재를 했지만 보도 못했던 내용들을 보도해. 대권 후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도 살펴 보고. 이건 지진이야, 대지진. 한눈들 팔지 마！"
기자들과 편집부를 독려하며 허원행은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대선에 엄청난 변수로 등장한 김현철이다. 김현철의 비리는 청와대로 옮겨갈 것이며 김현철의 돈 출처는 결국 `한보'의 실질적 책임자를 가려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김현철이 국방장관까지 추천했단다.' `국회의원은 물론, 국무총리 임명에까지 개입했다는 소문이 있다.' `언론사에까지 자신의 인맥을 심어 놓았고 YTN 사장에 김장관을 넣으려다 실패했다.'
`국회 재계 정계 군부 등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한군데도 없다.' `부산시장 서울시장을 거쳐 대권을 준비했다.'
소문은 불길처럼 치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