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공화국] 조직강화 (10)
기사입력 1997년 05월 20일 14시 15분
하지만 그도 한보건설 빌딩에 관한 소문과 징크스는 깨지 못한 것 같았다.
중구 서소문동 83－5에 위치한 한보건설 빌딩은 북한산과 마주하여 산의 정기(精氣)를 훼손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래서 원래 주인이었던 율산이 무너졌고 그 다음 진흥기업, 유원건설이 차례로 무너졌으며, 결국 한보도 그렇게 쓰러진 것이라고들 했다.
또 북한산 터널을 공사했던 과거 기업들이 모두 무너졌는데, 최근 유원건설이 북한산 터널공사를 하다가 쓰러졌고 이 사업을 인계받은 한보가 쓰러졌다는 속설도 있다.
아무튼 한보는 한국 경제에 엄청난 재앙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정계 거물들이 구속되었지만 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몸체'를 밝히라는 여론이 사법부를 압박하고 있었고, 검찰은 검찰대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홍인길은 실체가 아니다. 깃털을 잡고 끝낼거냐. 김현철을 수사하라."
"안된다. 시중에 떠도는 설(設)로는 수사가 불가능하다."
"그래도 수사하라."
"증거가 없다. 이건 야당의 정치공작이다. 증거가 있어야 한다."
"김현철이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무슨 소리냐. 수사하면 다 나오게 돼 있다."
검찰에 대한 불신이 높아만 갔다. 하지만 야당도 국민들도 김현철이 국정에 개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잡지 못하고 있었다.
허원행은 몇번이나 망설였다.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테이프만 꺼내들면 김현철 수사의 단초가 될 것이다.
"이 테이프를 공개해?"
하지만 측근들이 극구 만류했다. 구태여 집권당이나 청와대를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허원행은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많은 변화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나라가 이런꼴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일종의 의협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테이프를 공개하면 운신의 폭이 좁아집니다. 어차피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입니다.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연구소 정치분석 담당자의 충고가 계속되었다.
"목표는 제8공화국의 대통령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후원할 것인가도 정해지지 않은 판국에 한 팀을 적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립시다."
"며칠후 일본엘 좀 갔다와야겠어."
"일본요? 이 판국에?"
"음. 가서 박회장님 뵙고 와야겠어."
"네！ 박고문님. 박태준…."
"음. 만일 그분이 귀국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하겠다면 그분이 나서든, 아니면 DJP를 밀든, 같은 TK그룹 인사들끼리 새 정당을 만들든 한동안 화제가 될거야. 그분께 창간호 드리고 말씀을 좀 들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