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훈기의미국야구] 100만 교포들의 '대리전사'박찬호
기사입력 1997년 05월 18일 14시 53분
박찬호（24．ＬＡ 다저스）는 신시내티 원정 때면 항상 켄터키주를 방문한다.
오하이오주에 있는 신시내티에서 켄터키주의 코빙턴이라는 오래된 도시로 이동하려면 택시를 타고 1860년대 남북 전쟁때 만들어졌다는 낡은 철교를 건너 10분 정도만 가면된다.
ＬＡ의 할리우드가 생기기 전 무성 영화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었다는 코빙턴은 100년 이상된 오래된 건물들이 유령처럼 늘어서 있는 썰렁한 곳이다.
그곳에는 `강변'이라는 한국 식당이 있다.
지난 16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를 앞두고 박찬호가 이 식당에 들어서자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마치 친 아들이 돌아온듯 반갑게 맞았다.
작년에 원정 왔을 때 전화번호부를 뒤져 이 집을 찾아냈다는 박찬호는 신시내티만 오면 반드시 이곳을 찾는다.
주인 아저씨는 서울서부터 축구광이었는데 박찬호를 알고부터 야구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단다.
미국 전역에 퍼져있는 100만여 동포들에게 `박찬호의 의미'는 고국의 팬들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뜨거운 애정과 관심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미국의 동포들에게는 박찬호가 자신들을 대신한 투사라는 의미가 짙다.
말이 안 통하고, 문화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그리고 유색 인종이라면 차별부터 하려드는 경향이 농후한 미국 땅에 이주해 사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루 하루가 전쟁이다.
그리고 단지 한국인, 유색 인종이라는 것 때문에 생활의 곳곳에 넘어서기 어려운 벽들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박찬호라는 젊은이가 돌연 한국에서 날아와 세계 야구의 최고봉인 메이저리그에서 상대 타자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게됐다.
박찬호가 삼진을 잡고, 이닝을 마무리하고 승리할 때마다 동포들은 알게 모르게 쌓였던 울분을 시원하게 터뜨려버린다.
박찬호가 안타를 맞고 경기에 패하면 마치 자신들의 투쟁이 실패한 것처럼 안타까워한다.
강변식당의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다 먹지 못할 만큼 음식을 자꾸 갖다 주면서 꼭 이기라고 성원한다.
다저스 경기가 치러지는 미국의 어떤 도시를 가도 숫자가 많고 적고를 떠나 동포들의 반응은 매한가지다.
어느덧 박찬호는 미국 동포들의 이민 삶의 애환을 대신한 `대리 전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