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공화국] 머리를 굴려라 (9)
기사입력 1997년 04월 30일 15시 12분
노동법, 안기부법을 통과시킨 청와대와 신한국당 지도부는 다소의 노동파업을 감수할 작정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또 며칠만 지나면 연말연시 휴무로 돌입한다.
이 기간이 지나면 노조파업도 한풀 꺾이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뜻한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고비용 저효율'에 따른 경쟁력 약화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그보다는 비자금 사건으로 잔뜩 위축된 대기업들에게 혜택을 준다는 계산이 있었다.
차기 선거를 앞두고 재벌급 기업에 선물을 준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매스컴을 한껏 활용할 작정이었다.
연말 내내 `파업가담 기업체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 그렇게 하면 사기가 떨어진 노조는 스스로 자멸하게 될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러나 그 판단은 옳지 않았다.
연말부터 시작된 파업과 쟁의는 전국으로 번져갔고 나라는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대부분 공장이 문을 닫고 근로자는 거리로 뛰쳐나왔다.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의 일사불란한 시위주도는 대단히 큰 효과를 보고 있었다. 권영길, 권영길이 전국을 뒤덮었고 `노동악법 철폐！'의 구호가 전국을 메웠다.
"어떻습니까 그쪽은."
1월10일. 차회장 앞으로 걸려온 허원행의 전화다.
차회장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모든 기업 대부분이 감원을 단행했다. 그것도 합법을 내세워. 그리고 그들은 이번 분규로 가뜩이나 어려운 재정을 완전히 뒤엎고 말았다.
회사들은 일을 못했다. 문을 닫고 거리로 뛰쳐나간 근로자들을 말릴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제일무역 그룹은 단 한건의 노사분규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려운 회사사정을 아는데도 차회장은 어김없이 보너스를 지불했고, 봉급까지 인상했다.
노조지부장을 비롯한 여성근로자 대표가 모여 회사에 보답하는 방법을 토의했다.
"그동안 다른 기업과 달리 우리 제일무역 그룹은 탄탄하게 경영해 왔습니다. 어려운 가운데도 보너스와 월급인상까지 단행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보답 해야할 차례입니다."
그들은 인상분 급료의 반납, 하루 한시간 더 일하기, 물자 아껴쓰기 등 회사 살릴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결의문을 채택하는 대회를 사내 대강당에서 갖기로 했다.
차회장은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사실 감원계획의 유혹을 받은건 사실이었다. 다른 회사들은 파업으로 인한 손실발생이 엄청났다. 그 돈으로 직원들 감원 시키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허원행, 참 묘한 녀석이야."
그리고 아들을 생각했다. 허원행이 아니었다면 아들 영일이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30분이 지나면 허원행이 찾아올 것이다.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