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28)
기사입력 1997년 03월 22일 14시 51분
북문을 빠져 나왔을 때는 묘시경이어서 마악 햇살이 보이려는 시각이다.
그들은 산길을 타고 나아갔다. 윤의충의 앞을 걷던 만척이 머리만 돌렸다.
"식구 아홉을 잃었소이다. 장군."
"내탓이다. 무모했어."
뱉듯이 말하자 만척이 머리를 저었다.
"조금전 성안 싸움에서는 셋이오,황판의 대문 밖에서 기습을 받아 여섯을 잃었소이다."
"……."
"놈들은 우리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소이다."
그들은 일렬로 걷고 있었는데 모두 이십여명이다. 만척이 인근의 야적들을 모아온 것이다.
윤의충의 뒤를 걷던 구광이 무겁게 입을 떼었다.
"새벽에 유수병마사 박황이가 다녀갔소."
"다녀가다니?"
이제는 윤의충이 머리만을 돌려 묻자 구광이 뱉듯이 말했다.
"대감의 사저에 말이오."
잠자코 걷는 윤의충의 등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황판대감과 박황은 내통하고 있었소이다. 나도 오늘 들었소."
"그렇군."
앞쪽의 만척이 이를 갈았다.
"그놈 서아무갠가 하는 교위놈이 가고 나서 바로 기습을 받았소이다. 장군."
그렇다면 야별초지유 오탄을 살해한 것도 황판과 박황이다. 박황의 정보를 받은 황판이 길목을 덮쳤을 것이다.
"역적."
윤의충이 낮게 말했다.
아직도 김준은 박황을 심복으로 믿고 있다.
그동안 오갔던 수많은 밀서는 황판에게 건네졌을 것이고 그것이 왕창국을 통해 쿠빌라이와 고려왕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갑자기 윤의충이 발을 멈췄으므로 구광의 몸이 바짝 붙어서며 멈춰섰다.
긴대열이 굽은 산길을 채우고 섰다. 윤의충이 조금 턱을 들었다.
그의 시선이 앞쪽의 산등성이를 향하고 있다.
"탄 냄새가 난다. 피비린내도."
맞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가 바위산의 골짜기이다.
윤의충이 만척을 바라보았다. 이제 핏자국을 씻은데다 죽은 장교의 옷을 갈아입어 형상은 제대로였지만 타는듯한 시선이었다.
"부하들은 여기에 남겨라. 너하고 둘이서 먼저 가보도록 하자."
"나도 가겠소."
구광이 따라 나섰으므로 셋은 서둘러 등성이로 다가갔다.
등성이에 다다른것은 잠시 후였다. 마른 풀줄기에 몸을 숨긴 그들은 아래쪽 골짜기를 내려다 보았다. 두어 군데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골짜기의 이곳 저곳에 널린 시체가 보였다. 조그만 것은 아이이고 치맛자락이 펴져 있는 것은 여자일 것이다.
골짜기를 훑고온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이젠 피냄새가 진하게 맡아졌다.
"어이구."
낮게 신음소리를 뱉은 만척은 넋이 나간 얼굴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악문 윤의충도 골짜기를 쏘아본채 굳어져 있었다. 듣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만척의 일행을 쫓아온 놈들의 소행이다.
"어이구, 어머니."
만척이 다시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만척은 노모 한 분만을 겨우 모시고 왔다.
육순의 노모는 요즘 더운 밥을 매일 먹으면서 몹시 행복하게 살았다.
윤의충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돌아가자. 다 죽었다."